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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자꾹 May 15. 2024

뛰어!

5월이 되니 어디를 둘러봐도 푸르다. 볕이 좋은 날이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이럴 때면 생각나는 곳이 있다. ‘백마역’. 90년대 젊은이들에게 ‘백마역’은 설렘의 대명사였다. 신촌역에서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남짓이면 도착하는 ‘백마역’은 잠깐의 일탈을 느끼게 해주는 해방 공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날은, 재수할 때 같이 생고생하다 절친이 된 친구와 그 애의 남자 친구와 함께 동대문 근처에 있는 영어 학원에 등록하려고 했다. 그 학원은 저렴한데 체계적으로 강의를 잘하기로 유명해서 등록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고들 했다. 지금으로 치면 K-POP 스타 콘서트 예매하는 정도라 생각하면 되려나.     


그 학원에 등록하려면 밤새 줄 서서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엄마들은,     


“계집애들이 어디 밖에서 밤을 새우냐!”     

고 꾸짖고는, 보내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절친의 남자 친구에게 자리를 잡아달라는 무리한 부탁을 해야 했다. 우리는 그 친구만 믿고 새벽 첫차를 타고 동동거리며 학원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우리를 기다리는 건 학원 등록증이 아니라 미안함을 가득 담고 있는 그 애의 남자 친구 얼굴뿐이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대리 접수를 할 수 없었다며, 우리한테 미안해서 본인도 등록하지 않았다고 했다. 아쉽고 속이 상했지만 밤을 새우고도 등록을 못 한 그를 보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늘 다니던 종로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종로에 영어 학원이 많은 탓도 있었다. 몇 군데 학원을 알아봤지만, 수강료가 턱없이 비쌌다. 우리는 쿨하게 영어 학원을 포기하고, 근처 도넛 가게에서 커피와 도넛으로 아침을 때웠다. 우리 중 가장 형편이 나았던 친구가 돈을 냈다.      


난생처음 새벽부터 무슨 큰일을 할 것처럼 집에서 나왔는데 너무 허탈했다. 아침이라 할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집에 가기는 더 싫었다. 우리 중 한 명이 백마역에 가보자고 했다. 말로만 ‘백마역 백마역’ 하고선 사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꽤 낭만적이라며 다들 흔쾌히 동의했다. 경비는 학원비 내려고 했던 돈에서 조금씩만 빼서 쓰기로 했다. 집에 가서 혼나는 거야 나중 일이었다.     


좀 쌀쌀하긴 했지만 놀러 가긴 좋았다, 놀러 가는데 나쁜 날씨가 있을까마는. 기차는 몇 칸 되지 않았고 전철처럼 옆으로 나란히 앉아서 가는 거였다. 완행이라 느리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여행 입네, 탈출 입네 하면서 마냥 즐거워했다. 한 시간쯤 후에 백마역이라는 안내가 나왔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려 고개를 둘레둘레 하고는, 여기가 말로만 듣던 백마라며 깡충깡충 뛰며 좋아했다.     


그 당시 백마는 일산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이었다. 시골길과 풀, 논과 밭 그리고 주점과 카페들이 늘어서 있었다. 제일 유명한 곳은 ‘화사랑’이었다. 서울을 벗어났다는 사실에 신난 우리는 시골길과 카페, 주점들을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배가 고팠다.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다. 우리는 그 많은 주점 중의 한 곳에 들어갔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한 조도의 그 분위기가 좋았다. 엉큼한 청춘들이었다.   

  

허기진 배와 허탈한 마음을 한꺼번에 채우겠다고 파전과 동동주를 시켰다. 세상이 어쩌고, 학교가 어쩌고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다, 취직은 어쩌지 하면서 걱정을 늘어놓기도 했다. 오랜만에 서울을 떠나니 공기가 좋아서 술에 안 취한다며 동동주와 파전을 추가로 시켰다. 낮술에 취해 돈 걱정은 할 겨를이 없었다.      


다들 벌겋게 취했다. 우리 중 하나가 정신을 차렸다. 기차 시간 늦으니, 계산하고 나가자 했다. 돈을 준비해서 값을 치르려는데 뭔지 이상했다. 파전 한 접시 값이 빠져 있었다.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다들 속으로 이게 웬 횡재냐 하면서 주인에게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마나 고민하느라, 그 짧은 순간에 오고 간 눈빛이 수십 번은 더 되었을 거다.     


우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주점을 나왔다. 누군가의 입에서,     


“뛰어!”   

  

라는 말이 나왔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줄행랑을 쳤다. 우리는 헉헉거리면서도 뛰고 또 뛰었다. 그래 봤자 백마역이었다. 마음만 먹었으면 주인이 따라오고도 남았을 거리다. 우리 셋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초조하게 기차를 기다렸다. 기차에 올라타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그날 주점 주인은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대낮부터 한 구석에서 술 마시며 신세타령하는 우리가 안쓰러워서 모른 척한 걸까? 아무렴 어떠랴. 그날 그 일로 백마는 늘 내게 미안한 마음과 따뜻한 마음이 넘나드는 곳으로 남아 있으니 그걸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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