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수학’을 싫어하지 않았다. 성적도 상위권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3월까지는 별다를 게 없었다. 제1장 집합을 배울 때만 해도 열정에 불탄 내 모습을 반영하듯 ‘수학의 정석’과 문제집은 새까맸다. 하지만 인수분해와 무리수, 근의 공식을 배우면서 책과 공책은 점점 깨끗해졌다. 미분과 적분에 이르러서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과목이 되어버렸다.
3학년 수험생이 되었지만, 수학은 내게 틈을 주지 않았다, 싫지만 버릴 수도 없었다. 대학을 가야 했기에 오히려 더 가까워지고 친해져야 했다. 이해되지 않는 문제를 풀고 또 풀어서, 문제 유형을 어느 정도 외웠다. 조금씩 점수가 올랐다. 다른 과목의 점수를 최대한 올리고 원하는 학교의 등급을 조금 낮추어 접수했다. 아쉬웠지만 그런대로 만족했다.
날짜는 어김없이 가고 예비 소집일이 되었다.
다음 날이 시험이라고 학교는 오전에 끝났다. 수험표를 들고 내가 시험 볼 학교에 다녀왔다. 다음날 혼자서 가야 하니 동선을 잘 익혀야 했다. 다행히 시험을 보는 친구들이 여럿이라 함께 다녀왔다. 서로 부푼 꿈을 이야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저녁을 먹고 내일을 기약하며 잠자리에 누웠다. 처음으로 엄마한테 일찍 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잠이 설핏 들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집에 하나뿐인 전화가 잠자리에 울릴 줄이야. 그냥 자려고 했는데 엄마는 기어코 나를 깨운다. 이모란다.
비몽사몽인 가운데 시험 잘 보라는 이모의 격려에 건성으로 ‘네네’ 대답하고 자리에 누웠다. 잠이 달아났다. 그래도 자야 한다며 눈을 감았는데, 전화벨이 또 울렸다. 1학년 때 미팅에서 만났던 남자아이가 집 근처에 왔단다, 찹쌀떡을 주겠다고. 도대체 왜들 그러는 거지? 투덜대면서도 멀리서 찾아온 성의를 생각해서 주섬주섬 옷을 껴입고 집을 나섰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시험 잘 보라는 말에 고맙다고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어색하게 돌아왔던 것 같다.
진짜 잠이 깨버렸다. 화가 났다. ‘내 인생이 걸린 시험인데, 왜들 도와주지 않는 걸까?’ 나는 어떻게든 자보려고 노력했다. 억지로 잠을 청했지만,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 아침을 맞은 것 같다. 졸린 눈을 비비며, 엄마가 싸주신 도시락을 들고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고 학교에 갔다.
지하철역에서 학교까지는 10여 분을 걸어야 했다. 그날은 매섭게 추워서 며칠 전 내린 눈도 녹지 않았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땅만 보며 걸었다. 손과 발은 꽁꽁 얼었다. 학교에 도착하니, 교실 가운데 난로가 있었다. 따뜻했다. 옹크렸던 몸이 풀어졌다.
1교시는 국어 시간이었다. 그럭저럭 문제를 풀었다. 다행이라며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2교시 수학 시간을 맞았다. 서너 문제를 풀었을까, 갑자기 졸음이 밀려왔다. 수학 문제 지문을 읽다가 잠이 들었나 보다. 주위가 소란스러워 눈이 떠졌다. 다들 시험지와 답안지에 코를 박고 문제를 풀고 답을 옮겨적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려는 찰나, 5분 있으면 시험지와 답안지를 내야 한다고 시험 감독 선생님이 말했다.
아찔했다. 청천벽력이라는 말이 꼭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문제를 읽을 시간이 없었다. 시험지는 보지도 못하고,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답안지의 빈칸을 까맣게 채우는 데도 시간이 촉박했다. 정신없이 시험지와 답안지를 냈다. 그다음은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눈물을 삼켜야 했다. 태연한 척,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먹었다. 오후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시험을 끝내고 교문을 나서는데 맥이 풀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 하루 만에 세상이 바뀌었다. 찍은 게 반이라도 맞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찍신’은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7점’. ‘차라리 일렬로 줄 세우기라도 할 걸’하고 때늦은 후회를 했다. 그렇게 중요한 시험을 보는 데 잠든 학생을 깨워주지 않은 선생님들을 미워하고 저주했다. 그해 입시 제도가 바뀌었던 탓도 했다. 접수한 대학교에 가서 시험을 보고 결과가 나쁘면 낙방이라는 결과를 맞아야 하는 ‘선지원 후시험’이라는 기이한 제도였다.
당연히 입시에 실패했다. 무슨 짓을 해도 결과는 바꿀 수 없었다. 그 점수로 다른 학교를 다시 지원할 수는 없었다. 요즘 학생들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땐 그랬다. 후기 대학이 있었지만, 다시 시험을 치러야 했다. 전문대에 가려해도 다시 시험을 치러야 했다. 시쳇말로 사람을 죽이고 또 죽이는 제도였다. 그래서였는지 그 입시 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무튼 그때처럼 누군가를 많이 욕하고 울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충격이 너무 커서 지쳐버렸다. 더 이상 시험을 치를 수가 없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7점’이라는 낙인은 지워지지 않았다. 시험을 보다 어떻게 자냐는 엄마의 핀잔은 비수가 되어 나를 찌르고 또 찔렀다. 나는 무능력하고 못난 사람이었다. 우리 집에서 재수생은 사회인도 학생도 아닌 경계인이어서 내 존재가 설 자리가 없었다. 자존감은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 만큼 낮아졌고, 그때 받은 모멸감과 상처는 오래오래 나를 괴롭혔다.
1년 후, 재수생이라는 딱지를 떼어버리고 대학에 들어갔다.
합격자가 발표되자마자 수학책을 던져 버리며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이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