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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자꾹 Jul 03. 2024

엄마가 되는 길.._남은 이야기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날 오후부터 나는 설사를 계속했다. 나는 밥 대신 수액을 맞으며 누워 있어야 했다. 혈압이 다시 치솟았다. 병원에선 ‘임신 중독’ 때문이라고 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를 낳기 일주일 전까지 의사는 아이도 산모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조심스럽게 ‘촉진제 부작용은 아닐까?’ 생각해 봤지만, 우리 생각은 그저 추측일 뿐 아무런 근거도 댈 수 없었다. 어쨌든 나는 다시 중환자실로 가야 했다. 반나절의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다시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내 몸은 생각보다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의사는 내게 장염이라고 했다. 산모가 미역국은 고사하고 링거로 수액만 맞고 누워 있어야 했다. 아이를 만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혈액의 어떤 수치가 낮다며 수혈해야 한다고 했다.      


몇 팩인지도 모를 그 시뻘건 피를 내 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내 몸은 다른 사람들의 피를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온몸이 저리고 아팠다. 병원에선 별일 아니며 점차 적응할 거라 했지만, 내 입에선 “아파요! 아파요” 소리만 나왔다. 잠깐씩 나를 보러 들어온 엄마와 남편을 못살게 굴었다. 두 사람은 나를 주무르느라 잠시도 쉬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 가득했지만, 고통을 참기가 힘들었다.   

  

낮에는 그럭저럭 참을만했는데, 밤만 되면 고통이 나를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대고 괴롭혔다. 다행스럽게도 사흘째부터 상태가 조금씩 좋아졌다. 장염이 나아져서 죽을 먹을 수 있었고, 더 이상 수혈받지 않아도 되었다. 남편은 내 혈색이 돌아온다며 좋아했다. 그날 저녁에는 아이도 잠깐 보게 해 주었다. 아이는 잘 자고 있었다. 신기하고 감사했다. 내일이면 일반 병실로 옮기니까 아이도 마음껏 볼 수 있다. 기뻤다. 오랜만에 남편과 수다도 떨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남편이 다시 왔다. 아침 먹고 나면 일반 병실로 옮긴다기에 들떠 있었다. 남들은 당연한 일이 내게는 그저 감사한 일이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섰다. 갑자기 눈앞이 아뜩해졌다.    

 

“어! 어!”   

  

그렇게 두어 마디 소리를 지르고 나는 쓰러졌다. 그 뒤론 아무것도 기억할 수가 없다.     


눈을 떴다. 나는 누워 있는데 침대가 움직였다. 병실이 아니라 복도 같았다.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러고도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내가 눈을 뜬 건 밤중이었다. 내 몸에 알 수 없는 줄들이 주렁주렁 많이 달려있었다. 다시 중환자실로 왔다고 간호사가 말해주었다, 며칠 동안은 주사 때문인지 약 때문인지 계속 자다 깨다 했던 것 같다. 수액 말고 작고 노란 액체가 매달린 게 눈에 띄었다. 알부민이라는 단백질이라 했다. 단백질 수치가 너무 낮다고 했다. 간호사는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아주 비싼 약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중환자실에서 일주일을 지냈다. 남편과 엄마가 번갈아 간호하느라 너무 고생을 많이 했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 내가 쓰러졌을 때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까무러친 순간, 경기를 하듯 온몸을 비틀고 혀를 깨물려했다는 거다. 남편은 너무 놀라 어쩔 줄 몰랐는데, 근처에 있던 수간호사분이 내가 혀를 깨물지 않게 하고 능숙하게 내 몸을 제압했다고 했다.    

  

병원에선 혹시 모르니 뇌 CT를 찍자고 했단다. 그 병원엔 시설이 없어서, 구급차를 타고 큰 병원으로 갔다고 한다. 내가 잠깐 눈을 떴던 게 그때였나 보다. 다행히 뇌는 별 이상이 없었다고 했다. 얘기만으로도 내 마음은 후덜거렸다. 나는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 사람의 몸이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특이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을 텐데, 의사도 속 시원히 설명해 주지 않으니 답답했다. 다행히 그 이후로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다.   

   

입원하고 일주일이 지나자, 병원에서는 우리에게 아기를 퇴원시킬지 물어보았다. 나는 시어머니께 너무 어린 아기를 맡기는 게 죄송해서, 아이를 그냥 병원에 두겠다고 했다. 아기가 병원에 있으면 나도 남편도 자주 들여다볼 수도 있고, 간호사분들이 잘 돌봐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결정은 간호사들이 얼마나 바쁜지 몰랐던 우리 부부의 뼈아픈 실수였다. 병원에는 산모가 계속 들어왔고 아기들도 줄지어 태어났다. 간호사들은 일주일이 지난 아기에게는 관심을 둘 수가 없었다. 그걸 알았다면, 염치 불고하고 시어머니께 맡겼을 거다. 퇴원 후 아기를 보니 온몸에 땀띠가 나 있었다. 가슴이 아프고 아기에게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어느새 병원에 들어온 지 열흘이 되었다. 나는 이제 혼자 움직일 수 있고 소변과 피검사 결과가 정상 수준으로 돌아왔다. 혈압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아서 계속 약을 먹어야 했다. 아무튼 몸이 어느 정도 정상 수준으로 회복되니 일반 병실로 옮겼다.      


열 명이 넘는 산모들이 함께 있는 방이라 잠시도 조용할 새가 없었다. 처음엔 그 분위기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다. 며칠 지내다 보니 다인실이 좋은 점이 많았다. 보호자가 잠깐씩 자리를 비워도 서로 도와줄 수 있고, 정보를 빠르게 공유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병원에서 보름을 지내고서야 집에 올 수 있었다. 9월 중순 여전히 햇볕이 뜨거울 때 남산만 한 배를 안고 남편과 둘이 병원에 들어갔는데, 나올 때는 10월이 되어 서늘한 기운이 돌았고 우리는 세 식구가 되었다.     


다른 수치는 다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혈압은 퇴원할 때까지도 떨어지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평생 혈압약을 먹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슬펐다. 실제로 나는 아기가 100일이 될 때까지 혈압약을 먹어야 했다. 젖을 한 번도 물리지 못했다. 아기는 분유를 잘 먹고 잘 자긴 했지만, 나는 속상하고 미안했다. 아이가 아플 때마다 내 탓이라고 자책하며 울곤 했다. 그 녀석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 잔병치레가 많았지만 큰 탈 없이 잘 자라 주었다. 나는 그때 다시 얻은 삶을 열심히 살고 있다.   


  

*후기: 100일이 지난 뒤 혈압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몸을 잘 관리해서 4년 뒤에 둘째를 무사히 낳았습니다. 제왕절개 후 남들처럼 일주일 만에 퇴원해서 엄청 기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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