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추억의 순간들을 되짚어 보다 오늘은 갑자기 현재로 돌아왔습니다.
그 이유를 들려드릴게요.
화요일 아침에 노트북을 켰는데 무언가 이상했습니다. 화면은 켜졌는데 작업줄에 아무 아이콘도 뜨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아 로그아웃했다가 다시 로그인을 해봤지요. 마찬가지였어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억지로 전원을 껐습니다.
심란한 마음을 잡아끌고 도서관 책 모임에 갔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사람 마음도 아니고 기계가 달라지기를 바란다는 게 우스웠지만, 속상하고 답답했습니다. 사람들하고 책(『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얘기를 하면서도 머릿속에는 로딩이 안 되는 노트북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다시 노트북을 켰어요. 삼세번이라는 말도 있고 우리가 좋아하는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는 명언이 있잖아요. 하지만, 하지만, 노트북의 아이콘들이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답답했어요. ‘수요일에 연재해야 할 글을 좀 더 손봐야 하는데….’ 입이 바짝바짝 말랐어요. 20분 정도 지나서야 작업표시줄에 아이콘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옆에서 지켜보던 아들이 바탕화면과 작업표시줄에 있는 것들을 좀 지워보자고 했어요. 그것들이 너무 많아서 로딩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도 모른다고요.
그것 때문에 갑자기 느려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으니까, 꼭 필요한 것만 놔두고 지워버렸어요. 노트북을 끄고 10분 정도 기다렸다가 다시 켰어요. 이번에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어요. 그래도 달라진 건 없었어요. 마음이 급해졌어요.
스마트폰으로 서비스센터를 찾아봤죠. 인천 계양과 부천 중동점이 제일 가까웠어요. 제가 사는 부평에는 스마트폰 서비스센터만 있다는 거예요. 시간이 없는데…. 짜증 낼 시간도 없이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전화기랑 지갑을 챙겨 들고 부랴부랴 집을 나섰어요. 비가 오다 말다 해서 우산을 폈다 접었다 하니 왠지 더 속상했어요.
처음 가는 곳이라 그런지 지하철역에서 내려걸어도 걸어도 건물이 보이지 않았어요. 지도 앱을 켜고도 두리번두리번, 누가 봐도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이었어요. 아무튼 출구에서 직진으로 가면 나온다고 했으니 좀 더 걷기로 했어요. 후덥지근한 날씨 탓까지 하며 투덜대는데, 너무도 반갑게 ‘별 셋’ 간판이 선명하게 보였어요.
얼마나 마음이 급했던지 PULL이라고 쓰여 있는데 힘껏 밀었어요. 말 없는 유리문에 화를 벌컥 내다가 다시 보고는 머쓱해졌어요. 그 와중에도 보는 사람이 없나 살피고는, 곧바로 문을 당겨 열고 들어갔어요. 서늘한 냉기가 뜨거워진 머리를 식혀주니 터질듯하던 울화통이 차츰 가라앉았어요. 수리하는 곳이 3층에 있다는 안내문을 보고 엘리베이터를 찾았어요. 예전 같으면 걸어서 날 듯이 올라갔을 텐데, 부실한 다리를 내려다보면서 나한테 화를 냈지요.
3층에 올라가니 기계가 사람들을 맞이했어요. 이젠 익숙해져야 하는데도 여전히 거부감이 먼저 일었죠. 하지만 기계가 요구하는 대로 내 정보를 알려주고 표를 받았어요. 옆에 서있던 직원이 맨 앞 가운데 의자에 가서 기다리면 된다고 했어요. 그분의 친절함에 답답하고 짜증 났던 내 얼굴의 주름들이 조금씩 펴지는 걸 느꼈어요. 자리를 잡고 앉으니 내 앞에 7명이 있다고 전광판이 알려줬어요. 잠깐이지만 전화기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죠.
갑자기 전화기에 진동이 오고, 032 324로 시작되는 번호가 떴어요. 평소 같으면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데 그냥 받고 싶었어요. 제 이름을 알더라고요. 보이스 피싱이라 생각하고 끊으려는데, 수리 기사라면서 앞쪽 전광판에 번호를 표시했는데도 소식이 없어 전화했다네요. 분명 내 앞에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무튼 진행 속도가 빨라 기분이 좋아져서는 전화를 끊고 안으로 들어갔죠. 노트북을 보여주고 답답했던 이야기를 했어요. 점검하는데 15분 정도 걸리니 밖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어요. 이번에는 여유를 갖고 문자와 카톡을 확인했어요.
기사님이 준 진동벨이 울려서 들어갔어요. 하느님이 도우셨을까요? 기계적인 문제나 바이러스 감염도 아니고 그냥 프로그램이 서로 엉켜서 늘어진 거래요. 얼마나 감사하던지. 기껏해야 몇 시간이면 될 줄 알고 속으로 슬며시 웃었답니다. 해결 방법도 간단했어요. 프로그램을 깨끗이 지우고 다시 깔아야 한대요. 그런데, 24시간이 필요하다고, 집에 가서 데이터를 다 옮기고 오라네요. 청천벽력이었어요. 기사님의 명쾌하면서도 친절한 설명에 울지도 못하고 급히 일어나 나왔습니다.
다시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갔어요. 집에 가자마자 USB에 데이터를 옮기기 시작했어요. 독서 기록과 일기, 브런치 글쓰기 등은 바로 옮겼지요. 그런데 사진이 문제였어요. 폴더에 얌전히 들어있을 때는 존재감을 몰랐는데 옮기려니 사진과 동영상이 거의 모든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그때그때 정리하지 않으니 이렇게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정신이 없는 거죠.
압축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처음에 20분 걸린다더니 조금 있으니 30분, 나중엔 한 시간이 걸린다네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기계를 나무랄 순 없었죠. 5시 반쯤 마무리가 되는 것 같았어요. 끝이라고 안도의 숨을 쉬려는 순간 생뚱맞게 용량초과라는 말과 함께 압축은 없던 일이 돼버렸어요.
그때는 정말로 뚜껑이 열리는 줄 알았습니다. 몇 시간 동안 컴퓨터에 붙어 있었는데 결과가 너무 참담했어요. 얼른 정리해서 맡기고 수요일 저녁에 찾아와서 연재 글을 올리려던 계획이 무너져 버렸어요. 옛날 같으면 그 자리에 앉아서 펑펑 울면서 화냈을 거예요. 하지만 이제 산전수전과 공중전의 일부를 겪은 아줌마이니만큼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다시 해 봤자 당일 맡기기는 틀렸어요. 일단 밥을 먹기로 했어요. 퇴근한 남편에게 잠깐만 기다리라 하고는 저녁상을 차렸습니다. 냉장고에 있던 반찬으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다시 시작했어요. 남편이 건네준 대용량 USB 두 개로 남편 노트북에 옮기니 파일을 압축하지 않아도 한 시간 만에 작업이 끝났어요. 역시 장비빨이 무섭네요.
다음날 연재해야 하는 글은 남편 노트북에 옮겨 마무리해서 브런치에 저장해 놓고, 책 모임 이야기도 작성해 인스타그램에 올렸습니다. 일을 다 마치니 자정이 다 되었어요. 손목과 어깨는 아프고 머리는 너무 뜨거워서 가볍게 요가와 명상을 했습니다. 연재를 못할까 봐 안달복달하던 마음을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브런치 서랍에 넣어 두었던 글을 발행하고 아침을 먹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큰일 하나는 마쳤기에 불안감이 사라졌습니다. 아침 일찍 서비스센터에 가서 기사님께 노트북을 맡기고 잘 부탁한다고 깍듯하게 인사드리고 나니 일이 끝난 것처럼 편안해졌습니다. 신기했어요. 어제 오후의 나는 ‘어쩌지 어쩌지!’ 하며 세상의 반쯤은 무너진 듯 동동거렸는데, 오늘 아침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습니다.
1층에 내려오니 전날에 정신없어 보지 못했던 스마트폰과 시계들, 무선 이어폰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알록달록한 시곗줄과 귀여운 커버들까지 찬찬히 둘러보았습니다. 그 옆에는 ‘별다방’도 있었습니다. 때마침 무료 음료 쿠폰 유효기간이 며칠 안 남았다는 메시지가 떴습니다.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잠깐 앉아서 쉬기로 했습니다. 여유 없이 나오느라 커피 한잔 마시지 못했거든요. 신상 음료 프렌치바닐라 라떼를 선택했습니다. 오늘은 달콤한 걸로 나를 위로하고 싶었나 봅니다. 커피를 기다리며, ‘무얼 할까.’ 하다가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을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어떤 글은 너무 아프게 또 어떤 글은 더 따뜻하게 다가왔습니다.
처음엔 노트북 때문에 너무 놀랐지만,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고 연재 글도 아무 탈 없이 발행했습니다. ‘잠깐 멈춰도 되는구나. 차근차근하면 되는구나. 노트북을 켜놓고 종일 들여다보지 않아도 할 수 있구나.’ 이렇게 또 하나를 배웠습니다. 잠깐 나를 돌아보고 맛나게 차를 마시고 집에 가서 밀린 책을 읽었습니다. 다른 때처럼 즐거웠습니다. 신기하게도 불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제, 오늘의 일이 글감으로 떠올랐습니다. 내 인생을 아찔하게 했던 일들이 내 글감이 되고 소통의 수단이 되었듯이 어제의 답답했던 순간들이 또 내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후기
다음 날 아침 기사님의 전화를 받고 노트북을 찾아왔습니다. 기사님은 노트북을 깨끗이 청소하고 최신 프로그램으로 깔아 주셨다고 했습니다. 5만 7천 원이라는 거금이 들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나를 돌아보고 많은 걸 깨달았거든요.
기사님의 중요한 당부가 있었습니다. 작업을 다 마치면 꼭 전원을 끄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 전원을 끌 때 노트북 옆면의 파란불이 없어질 때까지 꼭 기다렸다가 화면을 덮으라는 얘기도 해주셨어요. 최근 들어 너무 바쁘다 보니 전원 버튼을 누르자마자 화면을 덮은 적이 많았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렇게 하면 프로그램들이 정리되지 않고 엉킬 수 있다고 합니다. 혹시나 급한 마음에 저처럼 바로 덮으셨던 분들 있으신가요? 앞으로는 조금만 천천히 하기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