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자꾹 Jul 10. 2024

반지여 안녕~~~

나는 장신구를 별로 즐겨하지 않는다.


가끔 특이한 디자인의 반지나 목걸이가 맘에 든다고 사고는 한두 번 하고 나서 장롱 속으로 밀어 넣기 일쑤다. 유일하게 하고 다니는 것이 귀걸이다. 그 이유는 씻을 때나 잘 때 굳이 빼지 않아도 별로 불편하지 않고 이물감도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결혼을 준비할 때도 남들은 금반지와 다이아몬드 반지는 기본이고 루비, 사파이어 등 하고 다니지도 않을 장신구 세트를 마련한 것을 자랑인 양 떠들어댔지만, 나는 그다지 맘이 가지 않았다. 예물을 많이 준비하지 못했다고 미안해하는 신랑에게 ‘젊은 사람들이 보석을 주렁주렁 이것저것 달고 다니는 게 별로 보기 좋지 않다’고 오히려 위로했었다.   

   

시어머니는 반지만큼은 다이아몬드로 해야 한다며 값은 저렴하지만 세공을 잘하는 곳에 5부로 주문해 놓으셨다고 했다. 반지는 내 결혼식에 맞춰 세공이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사연을 구구절절 읊을 수는 없지만 반지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뒤 한참이나 지난 후에 내 손에 들어왔다.     


반지를 처음 봤을 때, 다이아몬드가 크다는 것 말고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욕심이 너무 컸던 것 같다.) 반지를 손가락에 끼니 헛돌았다. 내 것 같지 않았다. 처음부터 내게 의견을 묻지도 않았고 어떤 모양인지 보여 주지도 않았기에 정이 가지 않았을까. 그래도 시어머니 앞에서는 그냥 ‘예쁘다’라고 말하면서 실없이 웃었다. 나는 시댁 식구들에게 반지를 잃어버릴까 봐 조심스럽다는 말로 둘러대고는, 재빨리 손에서 반지를 빼서 반지 함에 넣었다.


옆에서 보기에도 반지가 너무 헐거워 보였나 보다. 어머니는 알이 큰 반지를 해준 것을 생색내고 싶어 하셨지만 더 이상 그걸 끼라고 말하지는 않으셨다. 대신, 시간이 지나고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면 손마디가 굵어져서 잘 맞을 거라고 하셨다. 시누이들과 큰 동서들도 축하하는 건지 위로하는 건지 모를 어색한 말들을 보탰다.     

그 후로도 반지는 내 손가락보다는 장롱 속에 있는 날이 더 많았다. 나는 20대 중반 젊은 나이에 그렇게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다니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어쩔 줄 몰랐다. 나는 늘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인데 알반지만 덜렁 끼려니 그것도 어색했다. 처음엔 시어머니 눈치가 보여 몇 번 끼고 다녔지만, 손가락에서 헛도는 반지를 어디서라도 흘릴까 봐 그냥 집에 모셔 두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고, 아이가 생겼다. 아이가 세 살쯤이었나 보다. 오랜만에 월미도로 가족 나들이를 갔다. 남편은 나들이 가는 기념으로 결혼반지를 끼고 나가자고 했다. 나는 걱정이 됐지만, 남편의 성화에 고이 모셔 두었던 결혼반지를 끼고 나갔다. 아이와 셋에서 바닷바람을 잘 쐬고 돌아왔다. 한껏 멋을 내고 나섰지만, 월미도 음식점들이 너무 비싸서 눈 호강만 잔뜩 하고 돌아왔다. 그러곤 아이에게 인심 쓰는 척하면서 짜장면을 시켰다. 세 살짜리 꼬맹이가 얼굴에 한가득 짜장면을 묻히면서 맛나게 먹었다. 남편과 나도 오랜만에 배달 음식을 먹으니 편하고 좋다면서 신나게 먹어 치웠다.     


며칠 뒤였다. 남편이 갑자기,    

 

“반지 어딨어?”
“왜요? 있던데 있겠지.”     


 난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리곤 안방 장롱을 열었다. 장롱 안쪽 깊숙이 반지가 원래 있던 자리를 찾아봤지만, 반지는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머리가 작동을 멈췄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시 차근차근 그날을 되짚어 봤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집에 올 때까지는 반지가 있었다. 손을 씻으려고 식탁에 반지를 올려놓은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휴, 다행이다. 밖에서 잃어버린 게 아니니까 어딘가 있을 거야.”     


그리고 남편과 나는 온 집 안을 뒤졌다. 반지가 있을 만한 곳은 다 찾아봤다. 반지는 흔적도 없었다. 난리가 났다. 명색이 결혼 반진데 눈앞이 캄캄해졌다. 사실은, 반지가 없어진 것보다 어머니 꾸지람이 더 걱정됐다. 그 당시 시어머니는 호랑이처럼 무서웠다. 한복도 내가 원하는 대로 고르지 못했고, 집을 보러 다니다가 시댁에 들어와 살라는 말에도 대꾸하지 못했다. 예식장도 신혼여행지도 시어머니가 말씀하신 대로 했다. 내 맘대로 고른 것은 남편밖에 없었다. 내 결혼을 상징하는 물건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시어머니가 무서워 정신이 아득해지다니 기가 막혔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 힘으로 평생 그런 사치를 다시 누릴 수 없을 테니.  

   

어쨌거나 우린 반지를 꼭 찾아야 했다. 넓지도 않은 열다섯 평 집을 열 번도 넘게 뒤지고 또 뒤졌다. 집은 늘 난장판이었고, 나는 남편에게 짜증을 부렸다. 그날 왜 끼고 나가라고 그랬냐고 남편을 달달 볶았다. 그런들 사라진 반지가 갑자기 나타날 리도 없는데 날마다 남편을 닦달했다. 그리고 어머니께 꾸지람들을 까봐 늘 긴장 상태에 있었다. 어떤 날은 오히려 너무 화가 나서 ‘까짓 반지가 뭔데’ 했다가, 또 다른 날은 ‘아니지’ 하면서 찾고 또 찾았지만, 반지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지쳤다. 더 이상 찾을 곳이 없었다. 반지는 집에 없는 거라고 결론을 내려야 했다. 남편은 아무래도 그날 짜장면을 먹고 나서 비닐랩과 나무젓가락 같은 것들을 버릴 때 식탁 위에 있던 반지까지 딸려 간 것 같다고 했다. 쓰레기봉투가 있었다면 기꺼이 뒤져봤을 텐데, 이미 한참 전에 버린 뒤였다. 너무 속상했지만 계속 반지만 생각하고 살 수는 없었다. 결혼반지 대용품으로 큐빅이 박힌 금반지를 새로 장만했다. 내 손에 딱 맞고 디자인도 예뻤다. 나는 마음 편하게 어느 곳에나 끼고 다닐 수 있었다.     


우리는 처음엔 반지 얘기를 어머니께 비밀로 했다. 잘 끼고 다니지 않으니 말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다. 게다가 시어머니는 눈치가 100단이다. 결국 어머니께 이실직고했다. 섭섭해하시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불벼락이 떨어질 거라고 예상했지만, 어머니는 의외로 담담하셨다. 내가 지레 겁을 먹었던 거다. 얼마나 마음이 놓이던지…. ‘이럴 걸 그렇게 마음 졸였구나’ 하며 혼자 웃기도 했다. 그리고 반지는 우리에게 잊혀 갔다.      


그리고 2년 뒤에 우리는 이사했다.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결혼 5년 만에 스물네 평 집을 분양받았다. 새집으로 이사하던 날 아침에 어머니가 오셨다. 마지막으로 장롱까지 다 내간 뒤, 어머니는 집을 찬찬히 살피셨다. 흘리기 잘하는 며느리가 무언가 빠뜨렸을까 봐 그러시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한참을 그렇게 두리번두리번하시던 어머니 입에서 ‘여기도 없었구나!’ 하면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머니는 결코 반지를 잊으셨던 게 아니었다. 우리가 찾아볼 수 없었던 장롱 밑에 기대를 거셨던 거였다. 어머니는 허탈하게 웃으셨다. 그러면서 당신 아들에게 열심히 일해서 나중에 더 좋은 반지를 사주라고 당부하시며 앞장서 나가셨다. 어머니는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반지 얘길 꺼내신 적이 없다.    

  

남편은, 태연한 척하면서도 친구들의 반지를 힐끔힐끔 보는 마누라가 안쓰러웠나 보다. 어느 날 자기 반지의 다이아몬드를 빼서 내 반지에 박아주고는 자기 반지는 큐빅으로 바꿨다. 눈물 나게 고마웠다.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이렇게 다시 ‘내편’이 되었다.      


    

커다란 남편 반지가 자그마한 내 반지를 업고 있다. 우리 모습 같다. 참 고맙다.



*후기:

어머니 말씀이 맞기는 했다. 손가락이 정말 굵어졌다. 남편이 새로 해준 그 반지도 이제 손에 맞지 않아 목걸이에 펜던트처럼 걸고 다닌다. 그때 그 반지가 지금도 있었다면 내 손에 꼭 맞았을 것 같다. 사진으로도 남겨둔 것이 없어 그 반지는 기억에만 남아 있다. 아쉽지만 아쉽지 않다. 나는 오늘도 ‘반지의 제왕’처럼 남편의 사랑이 담긴 반지를 목에 걸고 다닌다.



손가락이 굵어져 슬픈 반지의 제왕



이전 09화 엄마가 되는 길.._남은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