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자꾹 Jul 24. 2024

잠실야구장
-나만 슬픈 이야기


모든 것은 김별 작가님의 야구장 관람기에서 시작되었다. 푸른 잔디가 깔린 야구장 전경과 신나게 즐기는 모습을 보니 아주 오래전,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던 그날 그 순간이 떠올랐다.  

 



오빠는 스포츠광이다. 정확히 말하면 운동경기 관람하는 것에 관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축구, 농구, 배구는 물론 어떤 경기든 텔레비전 중계가 있는 날은 모든 약속을 뒤로하는 건 기본이고 외국에서 벌어지는 경기를 볼 때는 밤새는 일이 다반사다. 그런 오빠에게 1982년 한국 프로야구가 시작된 것은 신이 내려주신 축복이라고나 할까. 얼마나 좋았으면,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막냇동생(참고로 저는 둘째입니다)에게 MBC 청룡 어린이 야구단? (암튼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에 가입시켜 귀여운 야구복과 모자, 공 등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그런 오빠 덕에 야구장에 가는 날이 왔다. 오빠는 그전에는 혼자서 가끔 야구장에 갔다. 그날은 무슨 일인지 나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입장권은 구했지만, 저녁은 없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당시 나는 살이 찌면 죽는 줄 알았기 때문에 ‘한 끼 정도야’ 하며 가볍게 오빠를 따라나섰다. 오래간만에 외출이라 나름 신경 써서 옷을 입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난스럽게 바람이 불고 쌀쌀했다.    

 

실물로 본 잠실야구장은 상상 이상이었다. 벌어진 내 눈과 입은 한참 동안 다물어지지 않았다. 서울로 연고지를 옮긴 OB 베어스와 해태 타이거즈의 경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경기장이 넓다 보니 선수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야구 규칙도 잘 몰라서 자꾸만 오빠한테 물어보느라 흐름이 깨지곤 했다. 하지만 관중석의 열기 때문인지, 직접 보는 현장감 때문인지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그런데 해가 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얇은 티셔츠와 청바지로 스며드는 찬 바람은 야구의 재미를 점점 앗아갔다. 게다가 뱃속은 꼬르륵 소리를 내며 요동을 쳤다. ‘춥고 배고프니’ 누구나 다 아는 바로 그 처지가 된 거 같았다. 옆에 앉은 아저씨가 컵라면을 먹는데 어찌나 부럽던지, 체면 불고하고 한 젓가락이라도 얻어먹고 싶었다. 그렇게 주린 배를 움켜쥐고 경기에 다시 집중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함성이 들려왔다. 타자가 친 공이 우리 쪽으로 날아왔다. 오빠는 그 공을 잡아보려고 애를 썼다. 그 순간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났다. 나는 앞, 뒤, 옆 사람들에 끼여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컵라면 아저씨가 몸을 일으켜 공을 확 낚아채는 순간 그 육중한 팔꿈치가 내 얼굴을 가격(?)했다. 나는 아파 죽는다고 난리를 쳤지만, 사람들은(오빠를 포함해서) 모두 공을 움켜쥔 사람만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 난리 통에 나만 피해자가 되었다. 참으로 서러웠다. 그 뒤로는 계속 얼굴이 화끈거리고 아팠던 것만 생각나고 경기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저렇게 야구는 끝나고, 오빠와 나는 몰려 나가는 사람들 틈에 끼어 야구장을 나왔다. 벌벌 떨면서 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정류장에 도착해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있어야 할 회수권은 사라지고 동전 몇 개만 짤랑거렸다. 오빠도 자신이 쓸 토큰 한 개밖에 없다고 했다. 가련한 신세였다.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돈을 꾼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나는 완전 내향형 I다). 어찌할 줄 몰라 갈팡질팡하는데 버스가 왔다. 

     

오빠는 나를 내버려 두고 버스에 올랐다. ‘어라? 될 대로 돼라.’라는 심정으로, 나도 오빠를 따라 버스에 올라 주머니에 남아 있던 동전을 모두 넣었다. 아마도 당시 초등학생 요금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요금을 내면서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요금을 넣고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종종걸음으로 맨 뒷자리로 달리듯 걸어갔다. 

     

그 시절엔 10장씩 붙어 있는 회수권을 교묘하게 잘라 11장으로 만드는 학생들이 많았다. 기사님들도 이에 질세라, 눈에 불을 켜고 엉터리 회수권을 찾아냈다. 그리고는 만인이 보는 가운데서 장본인을 창피 주고 다음부터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을 받아 내기도 했다. 고등학생이 초등생 요금을 냈으니 걸리면 어떤 사달이 날지 알 수 없었다.     


큰 소리로 야단을 치거나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줄 까봐,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고개도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버스 기사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는 거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기사님을 흘깃 바라보았지만, 그분은 그저 묵묵히 버스 문을 닫고 출발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차츰 기분이 나빠졌다. 자존심이 상했다. 들키지 않아 감지덕지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아저씨한테 내가 초등학생으로 보이냐고 따지고 싶었다. 주머니에 돈이 없었기에 내릴 때까지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분을 삭이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작아도 그렇지. 내가 초등(국민) 학생 꼬맹이로 보인단 말이야?’     


집에 와서도 다음날 학교에 가서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그날 받은 상처는 아이를 낳고 나서도 풀리지 않아, 유치원 다니는 아이에게도 지하철 요금을 손에 쥐어주고 표를 사게 할 정도였다. 내 좁아터진 심보는 똬리를 틀고 그 속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그렇게라도 자존심을 찾고 싶었던가 보다.       



             

그런데 오늘, 이 글을 쓰면서 옛일을 돌이켜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사님이 그 상황을 눈치챘지만 내가 돈이 없어 보여서 말을 안 했던 것은 아닐까? ’


이제는 내가 아무리 키가 작아도 나를 꼬마라고 부르는 사람이 없다. 누구라도 나를 그렇게 본다면 밥이라도 사줄 텐데….     


갑자기 웃음이 났다. 그 웃음에 맘에 있던 응어리가 툭 풀어졌다. 이젠 야구장에 가도 신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프로야구 #잠실야구장 #토큰 #회수권 #동전 #꼬맹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