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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자꾹 Jul 31. 2024

아직도 그 애는 울고 있었다.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을 읽다가 추억에 잠기는 경우가 많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은 몇 주 전 문정 작가님의 '칭찬받지 못한고래도 춤춘다'를 읽다가 떠오른 이야기다. 아주 오래전 꽤나 많이 아팠던 이야기...

     



중학교 3학년 때 일이다. 담임 선생님은 가사 선생님이었다. 학기 초에 자신은 아이들을 편애하겠다고 했다. 선생님 말 잘 듣고 잘 따라와 주는 아이들만 예뻐하겠다는 의도라고 생각했다. 교실 여기저기서 ‘아이!’ ‘쳇’ ‘어쩌냐’ 등등 여러 추임새가 난무했다. 쉬는 시간에는 공부 잘하는 애들은 좋겠다는 비아냥거림도 한 차례 돌았다.  

   

3학년이 되니 본격적으로 고입 연합고사를 대비한 공부가 시작되었다. 우리 학교는 공부를 열성적으로 시키는 학교로 유명했다. 학교에서 시키는 것만 해도 연합고사에서 상위권을 유지할 정도였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곤 했지만, 나처럼 집안이 어려운 아이들에게는 오히려 학교에서 공부를 시켜주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국영수가 중요한 건 마찬가지였다. 우리 반에는 국어 영어 수학에 과목 담당을 정해서, 그 담당자가 일주일에 한 번씩 학급 친구들과 모의고사 대비 문제들을 풀고, 급우들에게 설명해 주는 시간이 있었다. 우리 반 영어 담당은 나였다. 나는 중학교 입학 전부터 영어를 좋아했다. 영어 성적도 좋았고 학급 친구들도 내가 이끌어가는 문제 풀이 시간을 좋아했기에 몇 달 동안 별 탈 없이 진행됐다.  

    

어느 날 갑자기 담임 선생님이 영어 담당을 부반장으로 바꾼다고 했다. 그 아이도 영어를 잘 하긴 했지만, 내가 성적이 떨어진 것도 아니고, 아이들이 불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른 과목은 별다른 변동이 없는데, 유독 영어 담당만 바꾸는 이유를 담임은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억울했지만 담임 선생님에게 따지지도 못하고, 혼자서 속앓이를 했다.     


내가 영어 담당에서 짤린 후, 부반장 엄마가 학교에 다녀갔다는 풍문이 돌았다. 그 아이는 학급 친구들의 눈높이를 잘 맞추지 못해 반 아이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그래도 선생님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그 마음에 나는 없었다.  

    

6월이 되자, 전국의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은 고입 연합고사 모의고사를 치렀다. 나는 봄에 치른 모의고사에서는 엄마의 마음에 드는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엄마는 공부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고 했다. 아빠 없는 아이들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려면 ‘공부밖에 길이 없다’라며 닦달하곤 했다. 엄마의 맘에 들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던 기억이 난다.     

 

6월 모의고사 성적이 발표되는 날 종례 시간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제일 먼저 내 이름을 불렀다. 난 상위권이긴 했지만, 일등을 한 적은 없었다. 믿기지 않아 주저주저하다가 교탁으로 나갔다. 담임 선생님이 내민 성적표를 본 순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우리 반에서 1등, 전교 3등이었다. 처음으로 1등을 했다. 너무 좋아서 가슴이 벌렁대고 잠깐 공중에 붕 뜬 것 같았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담임 선생님의 한마디가 나를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너무 좋아하지 마라. 실제로는 네가 1등이 아니야. 다른 아이가 답안지에 표기를 잘 못 해서 네가 1등이 된 것뿐이야!”     


나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성적표를 받아 들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자리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내가 일등이 아니라고? 그럼, 누가 일등인 거야?’     


난 너무 억울하고 속상했다. 도대체 담임 선생님은 내게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잘했다고 칭찬해 주면 안 되는 큰 이유가 있었을까. 내가 속임수를 쓰거나 남의 답안을 베낀 것도 아닌데, 다른 아이가 일등이라니. 그리고 좋아하지 말라니.   

   

나는 1등 성적표를 받고도 좋아할 수가 없었다. 너무 슬프고 화가 났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창피했다. 쉬는 시간에 제일 친한 친구네 반에 가서 눈물 콧물을 쏟아내었다. 친구가 다독이며 위로해 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생각났다.
‘담임 선생님이 말한 편애의 진정한 의미가 이런 거였구나.’  

    

엄마는 하루 종일 이 집 저 집 학습지를 돌리느라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저녁이면 고된 몸을 누이기에 바빴다. 일을 하루 쉬고 학교에 올 수는 없었다. 담임은 그런 엄마한테 딸이 학교에서 인정받게 하려면 학교에 한 번 오라는 메시지를 슬쩍 남겼던 거였다.     


나는 종일토록 일을 하고 돌아와, 가까스로 힘을 내서 저녁을 차려준 엄마한테 담임 선생님이 내게 했던 말을 한마디도 전할 수 없었다. 엄마는 오랜만에 이를 다 드러내고 활짝 웃었다. 중학교 들어가서 처음으로 반에서 1등을 했다고, 잘했다고 등을 여러 번 토닥여 주었다. 나는 엄마 앞에서 울지 않으려고 맘을 다잡느라 아랫입술을 얼마나 많이 깨물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 이후로 다시는 일등을 하지 못했다. 담임 선생님에게 여봐란듯이 더 나은 성적을 보여 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공부할 때마다 ‘너는 1등이 아니야!’라는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까짓 그 말 한마디가 뭐라고, 자꾸 움츠러드는 내 모습이 싫었지만, 나는 자꾸 달팽이처럼 껍데기 속으로 숨으려고만 했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한 번도 모교를 찾은 적이 없다. 아니 찾아가지 못했다. 나를 예뻐해 주시던 영어 선생님, 국사 선생님이 뵙고 싶었지만, 담임이던 그 사람을 모른 척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포기했다. 지금이라면 당당히 다녀올 수 있을 텐데, 그때 그 아이는 너무 어리고 겁이 많았다.     


글을 쓰는 데도 자꾸 눈물이 나려 한다. 이제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상처 입은 ‘어린 나’는 여전히 울고 있었나 보다. 그 아이가 ‘이제 되었다’라고 할 때까지, 오늘부터 계속 다독여 줘야겠다.      

     

선생님은 교직에 머물면서, 나 같은 아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을까. 그런 이에게 ‘선생님’이란 호칭을 쓰는 게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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