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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자꾹 Aug 07. 2024

그날 그때 땡볕 아래서


무덥고 습하고 또 무더운 날! 

아들이 송도에서 열린 '펜타포 락 페스티벌'에 갔다. 얼음물에 1인용 돗자리 토시 얼굴 토시 모자 ……. 페스티벌은 한낮부터 밤중까지 한다고 했다. 땡볕에서 공연하는 이들도, 방방 뛰어야 할 이들도, 즐겁지만 고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더우면 그냥 오라고 아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엄마의 잔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아들이 스무 살이 훌쩍 넘어도. 아들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챙겨줘서 고맙다고 했다.  

   

아들이 사진을 보내왔다. 텔레비전 경연프로그램 <슈퍼밴드 2>에서 아들과 내 맘을 뺏어간 밴드 ‘카디’였다. 조그맣고 여리게만 보이는 예지가 내지르는 시원한 소리도 좋지만, 거문고 장인 박다울이 나는 제일 좋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가고 싶었는데, 땀 흘리면 절대 안 된다는 피부과 선생님의 당부가 있었기에 꾹 참았다. 봄이나 가을에 페스티벌을 하면 좋을 텐데….    

 

아들이 8월 한낮의 공연 소식을 전하니, 내 안에서 뭉게뭉게 이야기 하나가 피어올랐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중학생과는 달리 고등학생이라면 모름지기 방학에는 학교에서 ‘보충 수업’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아이들이 다 커버린 지금의 현실은 잘 모른다. 공부할 것이 더 많아진 세상인 만큼, 더 많이 고될 거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중학교 3년 내내 제일 친했던 친구가 있다. 그 아이는 중학교 때까지는 가수도 운동선수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이들이 이용과 조용필 팬으로 갈려 서로 삿대질을 하면서 싸울 때도 자기 할 일만 했다.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고 다들 공부를 시작할 무렵에서야 뒤늦게 한 가수에 푹 빠져 버렸다. 김승진이란 허여멀겋고 곱상하게 생긴 가수였다. 지금은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당시 그가 부른 ‘스잔’이란 노래를 모르는 여자애들은 거의 없었다. 그때는 아이돌이란 말은 없었다. 그냥 우리들의 ‘오빠’ 일뿐이었다.    

  

그 친구 말에 따르면, 우리가 즐겨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이제는 그 이름이 가물가물하다)에서 공개방송을 한다는 거였다. 공개방송은 오후 다섯 시쯤 시작하고, 참가하려면 그냥 그날 가서 줄을 서면 된다고 했다. 친구와 나는 일찍 가서 줄을 서기로 했다.     


 그 친구와 나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각자 학교에 가서 1교시 보충 수업을 끝내고 여의도에서 만나기로 했다. 결석하면 집으로 연락이 갈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학교에 가기로 했다. 나름 치밀하게 작전을 짰다고 생각했다. 1교시 끝나는 종이 울린 다음에, 짝꿍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교실을 나오는데 가슴이 엄청나게 두근거렸다. 자꾸 뒤를 돌아봤다. 지나가는 선생님의 의심을 받을까 봐 엄청 아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느릿느릿 학교를 빠져나왔다.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서야 여의도 광장에 도착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여의도에 공원이 없었다. 지금처럼 벚꽃 가득한 공원도 좋지만, 광장은 다른 의미가 있었다. 자꾸만 연식이 드러나서 안타깝지만, 그 시절 탁 트인 여의도 광장은, 갈 곳 없는 젊은 영혼들에게는 해방 공간이었다. 자전거와 롤러스케이트를 타면서 젊음을 뽐내기도 했고, 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척 서로 자연스럽게 스킨십이 오가는 공간이기도 했다.     


친구와 나는 오랜만에 만나서 두 손을 맞잡고 흔들면서 KBS 방송국 앞으로 갔다. 도착해 보니 보충 수업도 빼먹고 온 우리보다 먼저 온 아이들이 너무도 많았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방송국 구경은 엄두도 못 낼 것 같았다. 하지만 ‘혹시 모른다’는 일념 하나로 우리는 줄을 섰다. 날은 뜨거웠지만 다들 ‘승진 오빠’를 본다는 기대에 부풀어있었다.      


오후 두 시가 되자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처음엔 아차 싶었다. 하필 ‘민방위 훈련’ 하는 날이라니. 주변이 왁자지껄 소란스러워졌다. 그 시절엔 한 달에 한 번씩 적의 공격에 대비한다며 ‘대피 훈련’을 했었다. 지금은 거의 무색해졌지만, 80년대 90년대까지만 해도 사이렌이 울리면 누구나 가던 길을 멈추고 지하도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길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어야 했다.     


우리는 모두 그 사이렌이 익숙해져 있었기에, 소리가 나자마자 저마다 피할 곳을 찾아 들어갔다. 30분을 그렇게 조용히 있었다. 아니 다들 어찌해야 하나 떠들어 댔던 것 같다. 친구와 나는 그 틈을 타고 몰래 웃음을 나눴다. 그리고 비밀작전을 짰다. 30분 뒤에는 대피 훈련을 해제한다는 사이렌이 다시 울린다. 친구와 나는 어수선한 틈을 타서 눈빛을 교환하고 주먹을 꼭 쥐고 뛸 준비를 했다.     

 

사이렌 소리가 울리자마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죽도록 달렸다. 중 3 체력장 시험 때 그렇게 달렸으면 100미터 달리기에서 1등 했을 것이다. 우리는 오전에 줄을 섰던 곳으로 온 힘을 다해 달려갔다. 처음보다 훨씬 앞쪽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토록 지겹던 ‘민방위 훈련’이 우리를 도와주다니. 세상일은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가 보다. 아침에 우리 앞에 줄 서 있던 아이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었으니.    

 

번호표도 그 어떤 표식도 없이, 그저 먼저 줄을 서는 게 다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착순의 짜릿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그리고 믿지도 않는 하느님께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페스티벌이나 콘서트 입장권을 구하려면, 정해진 시간에 ‘땡!’ 하자마자 접속해서 사력을 다해 키보드와 마우스를 눌러대는 아이들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두 시간 정도를 더 기다리고 차례로 방송국 안으로 들어갔다. 밥도 못 먹었지만 하나도 배고프지 않았다. 난생처음 방송국에 들어갈 때의 신기한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우리는 들어가서도 한 시간을 더 기다렸다.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가 성공했고, ‘오빠’를 볼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있을 따름이었다.     


라디오 방송이라서 그랬는지 출연자들은 거의 다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이었다. 소탈하고 편안해 보여서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그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이가 있었다. 가수 ‘인순이’였다. 그이 혼자만 텔레비전에서 공연할 때처럼 화려한 무대 의상 차림이었다. 자신을 보러 오는 우리를 위해 차려입었다고 했다. 그때까지 인순이라는 가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 마음 씀씀이에 반해버렸다. 관객보다 방송을 더 신경 쓰는 가수들 사이에서 그이의 돋보이는 무대 매너는 내게 깊이 각인되었다.      


초대 가수들이 한 명씩 나왔다 들어가고, 맨 마지막에 오늘의 주인공 ‘승진 오빠'가 나왔다. 솔직히 그가 노래를 그렇게 잘한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친구 덕에 방송국까지 와서 신나게 환호성을 지르면서 노래를 들으니, 그날은 꽤 멋져 보였다.      


사회자의 인사로 공개방송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사인을 받겠다는 일념으로 부랴부랴 무대 밖으로 나갔다. 우리가 아는 얼굴들은 이미 떠난 뒤였고, 그 당시 신인이었던 ‘권진경’이라는 가수만 있었다. 그이는 내가 수첩과 볼펜을 내미니 수줍은 얼굴로 사인해 주었다. 지금 그이의 노래와 생김새는 기억나지 않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은 사인이 담긴 그 수첩도 이사 다니다 보니 없어졌다. 그렇지만 그날 수줍어했던 그이와 나의 표정은 아련하게 남아 있다.     



지난달에 그 친구를 만났다. 서로 바쁘게 살다 보니 10년 동안 얼굴 한번 못 봤다. 그래도 친구는 좋다. 언제 만나도 처음 만났던 그 시절로 순식간에 돌아갈 수 있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면서 얘기하다 둘 중 하나가 공개방송 때를 떠올렸다. 깔깔거리다가 눈물이 날 뻔했다. 친구에게 물어봤다. 


“넌 도대체 김승진이 어디가 좋았니?” 


친구는 자기가 그 이를 좋아했다는 사실도 이제는 희미하다며 그 이유를 어찌 알겠냐며 또 한 번 깔깔거리며 웃었다.     


누구를 좋아했으면 어떻고 왜 좋아했는지는 또 뭐가 중요할까. 그때 우리가 땡볕 아래서 함께 숨차게 달렸던 게 제일 중요한 거니까. 



https://youtu.be/uANcUaHAJsI?si=KacnCY1kJI63sDg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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