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빈 Sep 20. 2023

커다란 못이 있었다네

커다란 못이 있었다네


그렇게 커다란 못을 다 메우려면

얼마나 많은 흙이 젖어야 했을까


시절을 닮아 깡마른 팔뚝들이

참방참방, 굽은 물길을 내면

못물 위로 그려지는 눈 코 입

속눈썹에 매달린 물방울을 닦아내는

아이들의 순한 표정을 닮았을 테지

그러다 그 애들 중 몇몇은

깊은 수심과 손잡은 채로 영영

돌아오지 못했던 거지

젖은 빨래를 방망이질하던

아낙들 중 몇몇은

그 물그림자에서 언뜻

저승의 얼굴을 마주했을 테지


누군가는 그곳에서 살고

누군가는 그곳에서 죽었어


수문이 열리면 외롭던 못물이

우르르 마른논으로 흘러갔을 거야

못자리를 부지런히 돌아

갈라진 땅 사이사이를 적시고

초록은 더욱 초록이 되고

피부 검게 그을린 논 주인은

한참을 서서 못자리에 

못물 들이치는 소릴 들었을 테지

그러다 문득 그 소리,

올봄 못에 잠겨 죽은 아들의

가장 환한 웃음소리를 닮아서

한여름에도 가슴이 서늘했을까 


누군가 살던 물

누군가 죽었던 물이

어떤 것이 싹튼 흙

어떤 것이 묻혔던 흙과

다정하고 서럽게 뒤섞이는 거지

죽고 사는 일이 한데 뒤섞이면

신기하게도 삶이 되더란 말이지

노을 진 초저녁 잠잠한 못 주위를

꾹꾹 눌러 걷다 돌아가는 길에는

희한하게도 시나브로 살고 싶어지던 밤


물보다도 더 많은 흙이 못을 모두 메우고

우리는 이제 수심(水深)이 두렵지 않은

아파트 몇십 미터 고도에 살지만,

가끔 사는 게 왜 이럴까 싶을 때

고개 떨구고 아스팔트 바닥을 한참 보고 있으면

거기 문득, 찰랑이는 못물 소리


어떤 것이 살던 물

어떤 것이 죽었던 물

한참 걷다 보면 희한하게도

살고 싶어지던 물


우리 동네에는 

아주 커다란 못이 있었다네


이전 22화 낙동강 서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