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곁에 우리가 있다면>
트라우마의 기억은 피해자가 존중받으면서 사실이 규명되고, 모두가 함께 애도를 해주어도 회복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어서 잊으라”고 강요하거나 피해자들을 조롱한다면, 트라우마는 치유는커녕 더 악화될 수 있습니다. “아직도 힘드냐” “이제는 잊고 새 삶을 살아야지”라는 일방적 태도로는 어떤 회복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트라우마의 고통은 혼자만의 아픔으로 분리되지 않고, 함께하는 아픔으로 연결될 때, 나아질 수 있습니다. “당신의 고통과 함께 있겠다” “당신의 고통을 잊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고통을 기억하려는 진심 어린 노력이 이어질 때, 트라우마의 회복과 치유도 시작됩니다. 그래서 “아직도 세월호야?”라고 묻는다면 “여전히 세월호야!”라고 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기억하고 애도할 때, 우리사회는 사람의 안전과 생명을 최우선으로 두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했을 때,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베를린 시내를 걷다가 곳곳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명패가 보도블록에 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옆에 있던 독일 의사에게 물어보니, 그것은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이라고 했습니다. 독일어로 ‘걸려서 비틀거린다’는 ‘슈톨페른’(Stolpern)이라는 단어와 ‘돌’이라는 ‘슈타인’(Stein)을 합쳐서 ‘걸려서 넘어지게 하는 돌’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가로, 세로 10센티미터 정도인 명패에는 “몇 년에 태어난 누가 여기 살다가 언제 추방되어 어디서 죽음을 맞이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 명패를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한 유대인이나 장애인이 거주하던 집 근처에 박아 놓았습니다. 끔찍했던 기억을 되새기고,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마음에 새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은 참사도 어서 잊어버리라고 하는데, 독일은 이 수치스럽고 끔찍한 기억을 잊지 말고 영원히 기억하라며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거리에 버젓이 박아두었습니다.
저는 걸으면서 황금빛 명패를 다시 살펴봤습니다. 의미를 알고 보니 이전과 다르게 보였습니다. ‘걸려서 넘어지게 하는 돌’은 물리적으로 넘어지라고 한 게 아니라, 마음이 걸려 넘어지라는 의미였습니다. 도로에 안전 운전을 위한 과속방지턱이 있듯, 이 명패는 ‘마음성찰 턱’이었습니다. 지난날의 아픔을 잊지 말고, 희생자를 기억하라는 의미였습니다, 황금빛 명패는 또다시 참혹한 비극과 아픔이 일어나지 않도록 성찰하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아픔과 고통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아픔을 다독여주며 곁에 있을 수는 있습니다.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통은 위로받고, 아픔은 나눌 수 있습니다. 아픔과 고통의 곁에 있겠다는 것은 눈물이 되고 등불이 된다는 뜻입니다. 나 혼자가 아니라는 마음은 고통에 짓눌린 삶을 다시 일으킬 수 있습니다. 누군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산산이 부서진 마음에 조금씩 희망의 싹을 틔워주기 때문입니다.
비록 70년이나 지났어도 세상이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기 시작하면 트라우마는 회복과 치유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났으니 “잊으라”는 말은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아무 때나 쓸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의 고통은 몸과 달리 소멸시효가 없습니다. 쉬이 아물지 않습니다. 이제 ‘잊으라’는 말을 건네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트라우마 전문의 37년,
소외된 고통과 함께한 기억과 다짐!
《고통의 곁에 우리가 있다면》 중에서 https://c11.kr/19z0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