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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만년필 Oct 04. 2020

선물로 건네던 음악

세대를 이어주는 언어

 음반을 수집하면 주변에서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선물로 음반을 받는 일도 많았다. 내가 보유한 음반에도 선물로 받은 것이 꽤 있다. 카세트테이프 하나, LP나 CD 한장은 아주 훌륭한 선물이었다. 정성 들여 제작한 믹스테이프, 믹스 CD도 아주 좋은 선물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구든 믹스테이프 몇 개씩은 다들 갖고 있었다.


 요즘도 ‘음악 선물’이란 것이 가능할까? 아마도 신세대들은 누군가에게 음악을 선물한다는 개념이 없을 것이다. 내가 지켜본 바론 에어팟, 헤드폰, 블루투스 스피커가 그것을 대신한 것 같다. 시대가 저장매체를 버렸으니 당연한 것도 같다.

에어팟 (이미지 출처 : Pixabay)

 음악을 선물로 전할 때는 상대의 취향을 파악해서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악을, 또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건네는 것이 가능했다. 후자의 경우를 나는 참 많이도 했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음악을 함께하는 것은 늘 기쁜 일이었다. 간혹 신청곡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처음 근무했던 부서의 과장님은 나보다 27살이 많으셨다. 당시 50대 중반, 지금의 기준으론 그리 많은 나이가 아닌 듯도 한데, 그때의 50대는 왜들 그리 나이 들어 보였는지. 과장님은 주름도, 흰머리도 많으셨다. 세 살 더 많은 나의 아버지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셨다. 나와는 나이차만큼이나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사무실은 지금이랑 분위기가 아주 많이 달랐다.”과장님은 엄청난 애연가셨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셨다. 부서장이 담배를 피우니 같은 층의 다른 부서 흡연자들에게 우리 사무실은 즐겨 찾는 흡연실이었다. 비흡연자인 나로선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식사 때는 너무 빨리 드셨다. 빨리 먹는 편인 나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다른 어떤 반찬보다 배추김치의 푸른 잎으로 밥을 덮고 감싸서 드시는 걸 좋아하셨다. 봉지커피를 아주 많이 드셨는데 누가 언제든 커피 드시겠냐고 물을 때마다, 사양하시는 걸 본 적이 없다. 하루에 10잔도 거뜬히 드시는 듯했다. 회식을 하고 노래방엘 가는 날엔 오직 ‘카스바의 여인’이란 노래만 부르셨다.

 

 과장님은 퇴근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퇴근하실 생각을 않으셨다. 지금 나에겐 퇴근시간을 알려주는 알람 같은 친구가 있다. 이 친구뿐 아니라 요즘 젊은 세대들은 퇴근 시간이 되면 바로 인사하고 나가는 것이 일상적이다. 아무튼 그때의 나는 그러질 못해서 딱히 할 일이 없을 때도 눈치가 보여 퇴근을 못하곤 했다. 과장님은 주말에도 거의 사무실에 나가시는 것 같았다. '집에는 계시기가 싫으신 걸까?', '사무실 말곤 갈 데가 없으신가?' 생각했다. '사모님이랑 사이가 나쁘신가?', '과장님은 무슨 재미로 사실까?' 생각을 하곤 했다.

아이리버 iFP-300 시리즈 모델

 나는 학생 때도 그때도 이동 중엔 언제나 이어폰을 끼고 다녔다. 당시에 대세였던 아이리버 MP3플레이어를 갖고 있었다. 어느 날 과장님께서 “이게 뭐냐?”하시더니 나의 물건을 신기해하시며 관심을 가지셨다. 그 뒤로 가끔씩 “나 좀 듣고 줄게” 하시면서 나의 MP3를 빌리곤 하셨다. 그러다 한걸음 더 나아가 가끔씩 신청곡을 말씀하셨다. ‘Stand by Your Man 좀 넣어와라.’ 그리고 다음날 넣어왔냐고 물으시곤 또 빌려서 들으셨다. 가끔은 귀찮기도 했지만, 그리 싫지는 않았다.


Tammy Wynette 앨범 ‘Stand By Your Man’(1969년 발매)

 그러던 어느 날 “이 노래는 제목이 뭐냐?” 물으셨다. Santana의 ‘Supernatural’ 앨범에 수록된 ‘Smooth(featuring Rob Thomas)’였다. 그날부터 그 노래를 아주 좋아하셨고 그 후로 자주 들으시는 것 같았다. ‘과장님! 의외로 이런 신곡도 좋아하시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뭔가 공통점을 발견한 느낌, 조금 가까워진 느낌, 동호인이 된듯했다. 나는 과장님이 확실히 조금 좋아졌다. 직원들을 항상 많이 챙겨주시고 따뜻하신 분이라 나는 그분을 참 좋아했었다.


  언젠가 과장님 댁에 한번 간 적이 있다. 거기서 본 스피커는 내가 사람 사는 집에서 본 가장 큰 것이었다. 그 전에도 그 후로도 민가에서 그렇게 큰 스피커는 본 적이 없다. 과장님이 음악 감상에 상당히 조회가 깊으시다는 걸 그때서야 제대로 알았다. 당시는 외환위기 때 줄어있던 정년이 그대로 계속되던 터라 정년퇴직이 57세였다. 과장님의 급수에서 한 급 승진을 하면 정년이 60세로 3년 연장되는 이상한 제도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운은 과장님께 닿지 못했다. 과장님은 얼마 후 퇴직을 하셨다. 퇴직하신 뒤에도 인연은 계속되었다. 가끔씩 사무실을 찾아오셨고, 과장님의 아들 결혼식에도 갔었다.


 한참 후 내가 과장님을 다시 뵈었을 때는 중절모를 쓰고 계셨다. 머리카락이 거의 없으신 것 같았다. 폐암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고 계셨다. 암병동에 입원하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 S사의 MP3플레이어를 사서 Santana의 ‘Smooth’, Tammy Wynette의  ‘Stand By Your Man’을 우선 넣고 비틀스, 아바 같은 Old Pop을 가득 채워 병실로 찾아갔다. 쾌유를 빈다 말씀드리고 전해드렸다. 곧 나으시겠지 생각하며, 지겹고 따분한 병원생활에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

Santana의 앨범 ‘Supernatural’ (1999년 발매)

 과장님은 내가 드린 음악을 그리 많이 듣지 못하셨다. 아프시기 전, 아니면 퇴직하실 때 드렸다면 더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컸다. ‘Stand by Your Man', ‘Smooth’를 들으면 언제나 그분이 꼭 생각난다. 그때라도 드렸던 것이 그분께 제법 괜찮은 선물이었기를 바란다.


이제 음악은 선물하는 것이 아니다. 이젠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좋은 음악을 함께 하는 좋은 방법들이 사라진 건 매우 아쉽다.


잠시 스쳐 지나간 ‘MP3플레이어 시대’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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