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법이 아니라, 삶의 구조를 질문하기 시작한 엄마

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과거의 나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입원 사유를 듣고,

검사 수치를 보고,
의사의 처방을 정리하고,
환자에게 설명해 주는 사람.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하고
그에 맞는 절차를 따라가면
대부분의 상황은 정리되었다.

적어도 병원 안에서는 그랬다.


그런데 집에서는 달랐다.

남편의 피부에 병명이 붙었을 때,
나는 당연히 움직였다.
정보를 정리했고, 가능성을 나열했고, 선택지를 비교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은데도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


왜일까.

나는 처음으로
‘치료’가 아니라
‘생활’을 건드려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이 불편했던 이유는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방법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식단이 좋다.
저 보조제가 낫다.
이 프로그램이 효과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방법들은
우리 집의 하루를 전제로 하지 않았다.


남편의 성격,
아이들의 기질,
우리 가족의 속도.

방법은 바꿀 수 있지만
삶의 속도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결과만 바꾸려고 하면서
과정은 그대로 두고 있는 건 아닐까.

피부는 좋아지길 바라면서
스트레스는 그대로 두고,
면역은 안정되길 바라면서
긴장은 그대로 안고 살고.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건선 하나가 아니었다.
우리는 늘 ‘버티는 방식’으로 살고 있었다.

조금 무리하고,

조금 참아내고,
조금 늦게 자고,
조금 덜 쉬고.

큰 탈은 아니지만
늘 약간씩 무리하는 상태.


그 ‘약간’이 쌓여
어느 날 피부로 올라온 건 아닐까.

나는 그동안
질환의 구조는 배웠지만
삶의 구조는 배운 적이 없었다.


병원은 질환을 나눈다.
가정은 하루를 반복한다.

그 반복 속에서
몸이 무엇을 견디고 있었는지


나는 묻지 않았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무엇을 먹일까보다
어떻게 살고 있지, 를 먼저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치료법은 선택의 문제지만
삶의 구조는 태도의 문제라는 것을.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방법은 오래 가지 않는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무엇을 바꿀지보다
무엇을 계속하고 있는지를 보기 시작했다.

그 질문은 거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질문 이후
나는 예전처럼 무심하게 지나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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