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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대원 May 28. 2019

황진이가 알려준 속독의 비밀

속독의 목적은 빨리 읽는 게 아니라, 많이 읽는 것이다

질문 : 저는 아직 둘 다 하라는 말씀이 아직 정확하게 와 닿지 않는데요. 요즘 속독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데 속독부터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 좋겠어요. 


답변 : 네, 좋습니다. 우선 속독부터 말씀드려 볼게요.

책을 빨리 읽어야 하는 이유는 참 많습니다. 속독을 다시 여행에 비유해서 생각해 볼게요. 우리가 여행을 갈 때는 정해진 목적지가 있기 마련이지요. 예를 들어 파리로 여행을 간다고 생각해보면 우선 파리까지는 빨리 가는 게 중요할 거예요. 여행 일정이 열흘인데 파리를 가는 데만 8일 정도를 써버린다면 그건 파리 여행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일단 파리까지는 최대한 빨리 가야죠. 그리고 파리에 가서는 느긋하게 여행을 즐겨야겠지요. 빨리 가는 이유는 내가 여행하고자 하는 목적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속독도 비슷합니다. 세상에는 책이 너무 많아요. 하지만 어떤 책이 나를 이끌어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좋은 책을 만나기 위해서 빨리, 그리고 많이 읽어야 하는 거죠.


혹시 「동짓달 기나긴 밤을」이라는 시조를 기억하나요? 학창 시절에 한 번쯤은 배우게 되는 시조인데요. 여러분이 잘 아는 황진이가 지은 시조로 알려져 있죠. 정여울 작가의 『소리내어 읽는 즐거움』(홍익출판사, 2016)이라는 책을 보다가 아주 오랜만에 다시 만나 문장인데 읽는 순간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아래 시조를 한번 소리 내서 읽어보세요. 눈으로만 읽을 때와는 달리 몸으로 그 내용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습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안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어떤가요? 소리 내어 읽어보니 막연하게 학교에서 배웠던 것과는 느낌이 좀 다르지요? 

사랑하는 임과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을 밤이 가장 긴 동짓날 밤의 허리를 가래떡처럼 싹뚝 잘라서 이불 속에 꽁꽁 모아두었다가 임이 오시는 날에 굽이굽이 꺼내서 쓰겠다는 표현이 일품인데요. 사랑이라는 말, 그리움이라는 단어 하나 없이 어쩌면 이토록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애절하게 전할 수 있을까 싶은 문장이죠. 그런데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황진이가 사랑하는 임과 오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동짓날 기나긴 밤을 아껴두려는 마음처럼, 책을 빨리 읽는 이유는 그 시간을 아껴서 두고두고 볼 책을 만났을 때 꺼내 쓰기 위함이 아닐까’라고요. 독서는 연애라고 주장하는 저에게 딱 맞는 표현을 만난 것이죠.


속독(速讀)은 숙독(熟讀)을 위한 준비와도 같은 거예요. 속독의 목적은 한 권의 책만 빨리 읽으려는 게 아니잖아요. 다양한 책을 많이 읽기 위한 것이지요. 많은 책을 읽을수록 나에게 꼭 맞는 좋은 책을 만날 가능성은 높아지게 되니까요. 즉 속독의 목적은 다독에 있어요. 많이 읽지 않는 사람에게 속독은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반대로 많이 읽고 싶어 하시는 분들은 자연스럽게 나름의 속독을 터득하게 됩니다.


저는 책을 처음 볼 때는 대체로 속독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책을 빨리 봐도 이 책이 나에게 필요한 책인지 어떤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뒤에서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속독은 소개팅 같은 느낌이거든요. 처음 만난 날 진지하게 사랑을 이야기하는 건 뭔가 이상하잖아요. 책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목차를 보고 가장 궁금한 부분부터 찾아볼 수도 있고, 전체적으로 빠르게 읽어가다가 중요한 부분에서는 속도를 늦춰서 읽을 수도 있죠. 

중요한 것은 속독으로 한 번 읽는 게 독서의 끝이 아니라는 점이지요. 물리적으로 한번 읽어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결국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그 속에서 무언가 발견하기 위해서잖아요. 책은 그대로라도 책을 읽는 나의 수준이 달라지고, 나의 상황이 달라지고, 나의 관심이 달라지면, 책에서 전혀 다른 것이 보이거든요. 어떤 책은 빨리 대충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바로 간파되는가 하면, 꼭꼭 씹어서 먹듯이 읽어야 비로소 이해되는 책도 있으니까요. 


분명한 건 책을 빨리 읽을 줄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독서는 공부와 다르거든요. 공부는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면, 독서는 ‘하고 싶은 것’이니까요. 공부할 때 책을 읽던 방식대로 책을 읽고 있다면, 독서가 재미없을 수밖에 없어요. 제 경험상 빨리 읽는 경험은 그런 습관에서 벗어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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