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따라 다른 '읽기'가 필요하다.
질문 : 저는 본능적으로 책에 따라 나름대로 조금씩은 다르게 읽어왔던 것 같은데요.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다양한 독서법을 알아두고, 책에 따라서 그에 맞는 독서를 하라는 말씀이신건가요?
답변 : 바로 그겁니다. 예를 들어 시집을 읽을 때 빨리 읽으면 20분도 안되어서 다 읽겠지요. 그렇게 한번 다 읽으면 그 책은 이제 다 본 책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극단적인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100권의 책을 읽겠다고 마음먹고 시집 100권을 읽으면 일주일 안에라도 다 볼 수도 있을 거예요. 물론 시에 대해 공부한다거나 시가 좋아서 그렇게 읽는다면 의미가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물리적으로 100권의 책만 읽는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
당연히 시는 그렇게 읽지 않으시겠죠. 시는 그저 많이 보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니까요. 시의 어떤 문장 하나가 머리가 아닌 가슴에 꽂히는 순간, 시인이 말하는 세상을 만나게 되고 책장을 덮고 생각에 잠기게 되잖아요. 그런 순간을 만나려고 시를 읽는 것 아닐까요?
숙독은 그런 것입니다. 책을 단순히 읽는 행위가 아닌 책을 통해 더 깊은 사유로 통하는 길을 여는 독서죠. 책을 읽을 때 처음에는 작가가 적어 놓은 글자(text)를 읽지만 어느 순간 그 글자 뒤의 맥락(context)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그로써 세상을 읽어내는 또 하나의 통찰을 얻게 되는데요. 마치 세상이라는 큰 그림을 맞추기 위한 퍼즐 한 조각을 손에 쥐는 것과 같은 거죠.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다양한 퍼즐 조각을 얻기 위함이 아닐까요? 퍼즐 조각이 많아질수록 세상이라는 밑그림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옛 속담에 ‘장님 코끼리 말하듯 한다’는 말이 있어요. 코끼리의 코를 만진 사람은 코끼리를 커다란 뱀처럼 길쭉하게 생겼다고 말하고, 코끼리의 귀를 만진 사람은 커다란 원반처럼 넓고 납작하다고 말하고, 다리를 만진 사람은 건물 기둥처럼 굵고 둥글다고 말한다는 이야기죠. 다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각각 코끼리의 특성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문제는 전체 코끼리의 실체는 아무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거지요.
저는 우리가 책을 읽는 행위가 마치 세상이라는 코끼리를 만진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 나가다 보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