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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대원 May 29. 2019

#에필로그_감동은 어디에서 오는가?

표현의 깊이에 따라 우리가 느끼는 감동의 크기는 달라진다.

Keith Jarrett - Over the Rainbow (Tokyo 1984)

얼마 전 음악을 좋아하는 지인으로부터 영상 하나를 추천받았습니다.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Keith Jarrett)이 1984년에 도쿄에서 연주한 “Over the Rainbow”라는 곡입니다. 오버 더 레인보우는 워낙에 잘 알려진 곡이라 사실 큰 기대 없이 들었는데요. 곡이 시작한 지 10초도 되지 않아 피아노 건반 소리 하나하나에 내 몸이 반응하는 걸 느꼈습니다. 불과 5분 남짓한 연주영상에 도대체 몇 번이나 소름이 돋았는지 모릅니다. 그는 모두가 아는 곡을 치고 있었지만, 세상에서 한 번밖에 칠 수 없는 연주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문화평론가 우치다 타츠루가 쓴 <소통하는 신체>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신체표현을 보고 '깊이가 있다, 미적인 감동을 받는다'라고 할 때는 대개 그 움직임의 '분할도' 또는 '해상도'가 치밀해서 그렇습니다.


이 말을 키스 자렛의 연주에 빗대어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저처럼 피아노를 칠 줄 모르는 사람에게 “미”건반을 누르는 것은 그저 한 가지 소리에 불과할 겁니다. 반면 조성진이나 키스 자렛 같은 아티스트에게는 그 건반 하나를 누르는 동작에도 수십 가지 이상의 버전이 존재합니다. 즉, 표현의 해상도가 다른 것이죠. 표현의 분할하는 디테일이 곧 그 사람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평범한 사람들이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음악이나 회화, 조각 등 예술적으로 표현해 낼 때 우리는 감동을 받습니다.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고 감동받는 이유는 그가 표현하는 등장인물의 심리상태의 해상도가 남다르기 때문입니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잠깐 등장하는 사람들까지도 그 글을 읽고 있는 동안에는 잠시 그 사람 마음에 들어왔다 나온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합니다. 괜히 대문호라고 불리는 것이 아닙니다.


더불어 그런 작품을 읽는 사람의 수준도 감동의 크기를 좌우합니다. 예를 들어 힙합이나 아이돌음악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대다수의 어른들이 들어도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를 들을 수 있고 따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이 좋아하고 경험한 음악의 경험치가 감상의 수준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죠. 감상하는 수준의 해상도가 다르다고 할까요?

클래식 음악은 어떤가요? 음악 애호가들은 어떤 연주가가 연주했는지에 따라 같은 작품을 자기만의 색깔로 해석했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저처럼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차이를 깊이 느끼기 힘들겁니다. 

독서도 비슷합니다. 내가 많이 읽어본 분야의 책은 저자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언뜻 읽어도 바로바로 이해가 됩니다. 나아가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텍스트가 아닌 행간(行間)에서 느낄 수도 있고요.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서문에 적으면서 널리 알려진 이 문장이 납니다. 이 글은 정조시대의 문장가였던 유한준의 "석농화원(石農畵苑)"에 있는 원문을 의역한 것인데요.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지즉위진애 애즉위진간 간즉축지이비도축야)

"알면 진정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보게 되고, 그렇게 본 것은 모이게(畜) 되니 그것은 한갓 모이는 것이 아니다" 직역하면 이 정도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글을 쓰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비슷합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 닿을 수 없는 영역을 끝없는 애정과 열정으로 추구하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제대로 알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제대로 사랑한 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볼 수 있으며, 그렇게 본 것이 축적되어 성장의 밑거름이 됩니다. 그렇게 모여서 쌓인 것은 아무런 목적 없이 보고 쌓인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 될 겁니다.


키스 자렛의 연주에서 느꼈던 세밀한 표현의 깊이도, 톨스토이 소설에서 느꼈던 심리묘사의 세밀함도, 올림픽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운 김연아의 피겨 연기도, 1985년 라이브에이드에서 공연한 퀸의 공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글을 갈무리하는 에필로그에 감동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감동'이라는 단어가 주는 가치가 우리가 글을 쓰며 나 자신과 독자를 위한 최선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감동은 감동을 주려고 노력한다고 전해지는 건 아닐 겁니다. 감동은 표현의 깊이에서 오고, 표현의 깊이는 경험의 축적에서 오고, 경험의 축적은 진정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고, 무엇에 깊이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 보세요.


글을 읽고 글을 쓰며 스스로 감동할 만큼 성장하시길.

그 벅참과 희열을 고스란히 글 속에 담아낼 수 있기 바랍니다.

당신의 삶으로 써내려가는 멋진 글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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