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살고 있는 집을 계약하기 전, 나를 망설이게 했던 건 집 '안'의 문제가 아니었다. 좁디좁은 면적도, 엘베 없는 4층도 다 괜찮았다. 그보다 나를 당혹게 한 건 오히려 집 밖의 '길'위에 있었다. 집 가는 경로에 높고 긴 언덕이 떡 하니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은 하나가 아니었다.
15도는 충분히 넘어 보이는 넓은 폭의 메인 언덕길 아래에는 왼쪽과 오른쪽 두 갈래의 비탈길이 또 나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집을 가기 위해선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무조건 작은 언덕을 통과하고 다시 더욱 경사진 비탈길(메인 언덕)을 올라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힘들 게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고민 끝에 결국 계약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1억이 되지 않는 신축 원룸. 그로 인해 예상되는 주거비는 10만 원 남짓.
거기다 일상 속에 반강제적인 등산 코스를 추가해 체력 증진을 해보자는, 약간의 비장한 마음도 숨어 있었다.
절약과 건강을 모두 챙겨보려던 나의 야심이 통했는지 다행히 아직까진 내 선택에 후회는 없다. 이곳에 이사 와서 1억이라는 자산 목표도 달성했고 외출만 하고 돌아오면 8천 보는 거뜬히 넘겼으니 그럴 만도 하다.
최근에 <9평 반의 우주>라는 책을 읽다 문득, ‘힐세권’이란 신조어를 알았다. 원래는 ‘힐링’과 ‘~세권’의 합성어인데, 저자는 이 단어를 자신의 상황에 맞게 이렇게 변형해 설명하고 있었다. 치유의 의미인 ‘Heal’이 아니라 언덕의 의미인 Hill. 그러면서 'Hill세권'의 숨은 장점을 열 가지나 나열했다.
같은 Hill세권 주민으로서 나도 깊이 공감했다. 그중 몇 가지 항목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주변에 차도나 유흥가가 없어 무척 ‘고요하다’는 것, (나름) 고지대라 시야가 트여 있어 ‘조망’을 기대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덕을 어떻게 오르느냐에 따라 자신의 ‘건강’을 체크할 수 있다는 것까지.
나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아침이면 어떤 소음 없이 기분 좋은 새소리만 들려왔고, 옥상에선 개운산의 옆모습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작은 비탈길을 지나 긴 언덕을 연이어 오를 때마다 마스크를 내리며 헉헉 댄 덕에 운동에 굼뜬 나 조차도 요가를 등록했으니 작가의 말이 틀린 게 없었다.
나의 정신적 안정과 체력 단련 모두를 가능하게 만든 이 언덕은 요즘 들어 다른 의미로 뜻깊다. 앞서 설명했듯 메인 비탈길을 내려오면 왼쪽과 오른쪽 두 갈래의 작은 언덕길이 양쪽으로 나오는데, 이 사이에서 아침마다 택했던 건 항상 왼쪽이었다. 그쪽에 ‘회사 가는 버스’의 정류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정반대인 오른쪽으로 향한다. 이번엔 ‘학교 가는 지하철역’과 가까운 방향 이어서다. (요즘 게으름 방지를 위해 매일 모교의 도서관으로 출근 중이다.)
사소한 변화일 뿐이지만, 나는 이때 불쑥 실감하곤 한다. 나의 목적지가 달라졌음을. 진로의 방향이 틀어졌음을. 안전하고 익숙한 경로를 이탈했음을. 그렇게 갈림길 사이에서 가지 않던 방향으로 몸을 틀며 삶의 변화를 체감하는 중이다. 이런 자각은 묘한 기운을 준다. 뭐랄까.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감이 폭신하게 엉겨 붙어 등을 떠미는 느낌이랄까. 그것의 모양은 왠지 커다란데 뾰족하지 않고 푸근해서 되려 내가 기댈 수 있는 구름 같기도 하다. 첫 자취집으로 이사 가는 날 느꼈던 감정도, 8년 간 다닌 회사에서 마지막 퇴근을 하던 날의 오후도 이와 비슷했다. 낯설지만 어쩐지 시간이 갈수록 몸에 착 감길 것 같은 감촉이었다.
우려스러웠던 힐(hill) 세권에서도, 생각보다 이르게 맞이한 백수생활에도 결국 적응한 나에게 최근 고민 하나가 다시 던져졌다. 이번에도 ‘선택’의 문제였다. 다음의 두 가지였다. ‘지금 살고 있는 자취집에 계속 머물 것인가’ 아니면 ‘다시 본가로 들어갈 것인가.’
‘본가로 다시 들어가기’ 내가 쓰고도 믿기지 않는 옵션을 하필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이 시점에 떠올린 건 결국은 ‘돈’ 때문이었다.
백수가 이 선택을 한다는 건 별다른 소득이 없어 생활 경비를 줄이기 위해서일 거라 보통은 추측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주거비와 관리비를 지출하지 않고 차라리 그 돈을 엄마에게 드리는 게 더 낫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런 마음을 먹은 데는 집주인이 관리비를 6만 원에서 10만 원으로 올린 게 계기가 되었지만, 실은 그보다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백수를 자처한 (왠지 모를) 부끄러움을 돈으로라도 모면하고픈 마음이 더 크다. 어차피 나의 고정비 안에는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도 포함되었기에 자취집을 선택해도 약 50만 원의 지출은 피할 수 없다. 결국 같은 비용을 치르고 ‘혼자의 생활’을 택할지, ‘가족과 함께하는 생활’을 택할지를 골라야 하는 것이다.
엄마의 부족한 형편을 외면하기 싫은 마음과 혼자의 맛을 누리고 싶은 마음간의 충돌. 요즘 이 고민을 매일 눈 뜨면서부터 시작한다. 문득 궁금하다. 자취를 하기 전에 내가 회사를 관두었다면 독립을 결정했을까?
아침에 일어나서 심신이 안정되는 고요함을 몰랐다면, 수고스러워도 내 손으로 나만의 공간을 쓸고 닦는 재미와 보람을 몰랐다면, 누구의 개입 없이 하루의 시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낼 수 있는 자유를 몰랐던 과거의 나라면 어땠을까. 아마 과하게 아끼며 지내는 엄마를 위해 ‘본가’에 머물렀을 것이다. ‘일하지 않는 딸’이라는 미안함을 돈으로 상쇄하기 위해서.
그러나 이미 알아버린 힐세권의 장점을 내가 과연 포기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무엇보다 스스로 선택한 집에서 책과 글쓰기에 몰입하는 시간이 더없이 소중해졌다.
두 가지 악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할 때면
나는 이전에 해보지 않은 것을 고른다.
선택의 기로에서 운명적으로 이 문장을 만났다. 오늘 읽은 <아티스트 웨이>에서 발견한 격언인데, '악'이란 단어를 빼면 어쩐지 내 문제에 적용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했듯 과거의 나였다면, 마음이 편한 길을 택했을 거다. 미안함이란 감정을 돈으로 무마하는 ‘본가행’ 말이다. 그러나 나에게 맞는 공간을 알아버린 지금은 조금 더 힘주어 궁리하며 다른 대안을 생각해본다. 나를 최우선으로 두면서도 엄마를 도울 수 있는 방법에 관해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이거다.
언덕 집에 유지하는 걸 선택하되, 새로운 영역에서 벌어들일 수입의 10%는 가족을 위해 저축하기.
이건 미안함 상쇄의 목적이 아니다. 어떻게든 오래 하고 싶은 일로 돈을 벌어 곁에 있는 사람과 나누고자 하는, 나와의 약속이자 공언에 가깝다.
그런 의미로 내일은 임대인에게 계약 연장한다는 문자를 보낼 예정이다.
남은 기간은 앞으로 1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나를 강하게 만들어준 이 언덕 집에서
부디 무탈하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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