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를 떠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뮌헨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옆에는 30대로 보이는 독일남자가 앉아 있었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잠시 후 그가 들고 있던 상자를 열어 보인다.
"이건 이 지방 전통 쿠키야. 한 번 먹어봐. 크리스마스를 기념해서 우리 할머니가 직접 만드신 거야~"
홍콩 제*쿠키와 같은 예쁜 상자에 오밀조밀 담긴 쿠키는 제각각 모양의 알록달록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고, 할머니의 온정이 색색의 장식 모양 따라 흘러넘치고 있었다. 나는 감사인사를 전하며 쿠키 하나를 맛있게 베어 먹었다. 낯설고 어색하고 약간은 경계심을 풀지 않던 내게 따뜻한 정이 건네졌다. 할머니가 다 큰 손주에게 건넨 사랑의 쿠키가 내게까지 건네지면서 얼어있던 긴장감이 조금은 녹아내렸다.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하는 따스함을 느끼며 뮌헨에 도착했다.
대도시인 뮌헨은 크고 화려했다. 분위기의 반전을 느끼며뮌헨역에서 가장 가까운인기 있는 호스텔에 짐을 풀었다.해외여행에서 낯설고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방을 쓰는 건처음이어서 근육이 약간 움츠러들었다.
뮌헨 호스텔 - 내 자리에서 바라본 풍경
딸깍 문을 열고 케리어를 끌며 입장했다.
"아........ 안녕?" 어색해하는 내가 등장하자 곧바로 한 외국인 여자애가 중앙에 있는 책상에 걸터앉아 친화력을 뽐내며 질문 세례를 한다.
"안녕? 넌 어디서 왔어?"
"이름이 뭐야?"
"나는 00이고, 쟤는 00이고, 쟤는 00이야"
"나는 호주에서 왔고, 저 친구(남자)랑 같이 여행 왔어. 근데 우린 그냥 친구야. 저 친구는 게이거든. 하하하하. 우린 3개월간 여행 중이야."
그녀는 시원하게 본인 소개를 하고 TMI를 해댔다. 게이 친구를 슬쩍 보니 잘생겼다. 그런데 게이라니. 살짝 아쉽군.그녀가 나를 보자마자 모든 정보를 오픈해서 흠칫 놀랐지만 촌스럽게 놀란 티는 내지 말아야지. 자연스럽게 행동하자.
"아~ 하하.. 그렇구나"
"게이남(*편의상 게이남으로 표현)과 나는 여행 오려고 몇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했어. 쟤는 마트에서 밤낮으로 일 했어. 그리고 우린 짜잔~ 독일에 왔단다~ 난 밤에 나가 놀려고 지금 쉬고 있어. 하하핫~~ 밤에 노는 건 재밌어~~~~"
아니, 지금도 밤인데 밤에 나간다는 건 도대체 몇 시에 나간다는 뜻이니. 엄마 마음이 작동되려는 찰나에 핸드폰 하던 게이남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푸흣, 내 친구 지금 앱 통해서 알게 된 독일 게이남 만나러 가. 요 며칠 그 재미에 푹 빠졌어ㅋ 독일은 게이에게 천국이거든"
그녀가 게이남의 사생활을 폭로한다. 나는 낯선 이국땅에서 친구 하나 사귀기 어려운데 독일남자 만나기 참 쉽구나, 하하. 넘치는 개방적인 모습과 국경의 경계 없이 자유롭게 어우러지는 그들의 모습이 사뭇 어색하면서도 새롭게 다가왔다. 각자 다른 문화적, 사회적 배경과 다른 가치관, 다른 라이프스타일로 자신만의 여행을 그려가고 있었다.퇴사하고 진정 가슴 뛰는 일을 찾고자 독일에 온 나와, 독일 게이와의 데이트로 설렘이 가득한 또 다른 누군가가 한 시공간에 공존했다. 같은 숙소, 같은 도시, 같은 국가에 있지만 우린 전혀 다른 목적과전혀 다른 시선으로 각자의 기준대로 여행하고 있었다.
그래, 세상은 넓고, 우리는 다양한 모습을 하고, 모두들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거지!누가 맞다, 틀리다, 나쁘다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거야.여행 스타일이 천차만별이듯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도 천차만별일 텐데, 정해진 노선과 정해진 기준대로만 획일적으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재미없겠어! 그 안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한 걸 수도 있어. 각자의 기준대로 살아야 진짜 제대로 사는 거야. 나만의 여행스타일을 찾아가듯 나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찾아가 보는 거야!
1층 로비로 내려오자 한국인 여자들이 앉아있었다.3명이나 있어서 반가웠지만 말을 거는 데는 용기 한 스푼이 필요했다. 혼자 여행에서 친구를 사귀려면 먼저 다가가는 수밖에 없다. 용기 내어 말을 건넸다.
"하앗.. 안녕하세요?? 한... 한국인?(이신가요)"
그들은 온라인을 통한 일행, 일행의 일행 등으로 모인 구성이었으며 저녁을 먹기 위해 로비에서 모이기로 했단다. 나도 저녁 약속에 합류하고 싶어 졌는데 마침 한 여자분이 먼저 말을 꺼내주셨다.
"혹시 저녁 안 드셨으면, 같이 가실래요?"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여자, 첫 만남에 급 호감이 생긴다. 그렇게 서로 모르고 아는 사이 6명이서 근처 유명한 식당을 찾았다. 하우스 맥줏집 같이 포근하면서도100여 명을수용할만한 거대한 식당이었다. 바글바글한 인파와 왁자지껄 시끄럽고 산만하지만 흥겨운 분위기에서 우린 각자 흩어져 자리를 찾아냈고, 디저트까지 맛있게 먹으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나는 내일 일정을 함께 할 2명의 동행이 생기게 되었다.
바이에른티켓은 도시 간 이동하는 티켓인데, '뭉치면 싸다'의 느낌으로 인원이 많을수록 할인율이 높아져 싸게 구매할 수 있다. 마침 나와 다음날 일정이 같은 2명은 나를 격하게 환영해 주었고 우리는 다음날 아침 일찍 퓌센행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눈 쌓인 시골 마을을 지나 2시간 동안 달렸다. 한국에선 볼 수 없었던 이국적인 정취에 흠뻑 빠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얗게 뒤 덮인 독일 마을을 보는 것만으로 내 기분은 덩실거렸다. 그냥 시골 마을일 뿐이지만, 사무실과 회사를 벗어나 내 힘으로 이 자리에 있는 이 순간에 무언가 벅차올랐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풍경은 온전히 내 힘으로, 내 결정으로, 모든 용기를 끌어모은 결단으로 얻게 된 경험이다. 그러니 더욱 값질 수밖에 없다.
달리는 기차의 창밖을 배경으로 분위기 있는 사진도 찍어댔다. 기차여행이 주는 특유의 감성을 온전히 느꼈다. 자유로운 여행자가 된 이 기분, 짜릿함 그 자체였다. 진짜 여행하는 기분이랄까? 걱정도 없고, 고민도 없고, 경치도 좋고, 햇살도 좋고, 계획도 없다. 생각 없이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이 시간이 좋다. 나는 자유다!
초등학생 때, 두산동아와 같은 참고서가 있었다. 두세 개의 출판사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필독서로 참고서를 보고 공부했다. 주기적으로 사는 참고서의 가장 앞면에는 세계의 다양한 문화나 랜드마크, 관광지 등이 소개되어 있었다. 아마 세계를 향한 넓은 뜻을 품으라는 취지도 담겨 있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 날 새로 산 참고서를 펼쳤는데 나는 사진 한 장에 단숨에 매료되어 버리고 말았다.
독일에 있는 '노이슈반슈타인성'의 사진이었다. 나는 이 성의 아름다움에 한눈에 반해버렸다. 게다가 소개글을 보니 더욱 매력적이었다. 디즈니랜드의 모티브가 된 성이라고 했다. 오 마이 갓!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 환상을 담은 디즈니랜드가 이 성을 모티브로 했다고? 전 세계 수많은 건물과 성 중에 이 성이 뽑힌 거야? 정말 대단한 성이네! 얼마나 멋졌으면!
나는 참고서에서 발견한 작은 사진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성은 정말 아름답다. 이 성에 가보고 싶어. 나중에 커서 어른되서 언젠가 이 성에 꼭 가보고 싶어. 멀고 먼 나라에 있어서 방문하기 어렵겠지만,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난 이곳에 가볼 테야.'
이때, 이 사진을 보며 든 생각이 아마도 내 인생에 가장 최초로 했던 '버킷리스트'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룰 수 없는 엄청난 꿈같지만, 언젠간 꼭 이루고 싶은 그런 소망이었다. 어린 나는 해외여행의 실현 가능성이 매우 낮고 돈도 많이 들고 어려운 일임을 분명하게 알았다. 저가 항공도 없는 시대였고, 주변에 먼 거리의 해외여행을 다닌 사람은 들어본 적도, 만나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실현한 적 없는 막연하고 어려운 일임을 알았지만 어린 나는 소중한 꿈을 마음에 간직했다. 그리곤 들뜬 목소리로 거실로 뛰어나가 외쳤다.
"엄마, 이 사진 봐바! 여기 진짜 멋있지? 나 나중에 여기 가볼 거야~!!!"
"(귀엽다는 듯 미소 지으며) 응~~ 그래~~ 그러려무나^^"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눈치였다. 다시금 현실가능성이 성벽만큼 높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펜을 들었다. 먼 훗날 성에 가보려면 성 이름을 알고 있어야 했다. 이름도 길고 어려운 '노이슈반슈타인성' 나는 성 이름을 외워야 언젠가라도 갈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달력에 성 이름을 적어두고 외웠다.실현가능성은 중요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어떻게든 이루게 될 거란 강인한 마음은 어떤 의심도 없이 내 무의식 속에 스며들었다.
달리는 기차 안, 나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으로 향하고 있다.달력에 성 이름을 적어두고 외운 덕분일까. 아님 이름은 외우되 가능성은 의심할 새도 없이 잊고 살아서일까. 어느 날, 동화 속 환상의 성을 잊지 않고 찾아가는 날이 인생에서 찾아왔다.독일관광청이 관광객 대상으로 뽑은 독일명소 톱 100에서 1위를 차지한 성을 만나러 간다. 20년 전, 어릴 적 야무진 꼬마가 품었던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