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구체화
심리상담소에 처음 오면, 많은 분들이 내가 그동안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사건에 대해 상세히 설명할수록 객관적으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을 겪었는지는 그 사람에 대해 반쪽도 알려주지 못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느껴지는지를 통해 사건이 주는 의미를 해석해 나갑니다.
심리상담에서는 이 과정을 ‘구체화’라고 부릅니다. ‘갑자기 이별해서 힘듭니다.’ 속 감정들을 탐색해서 개인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이렇게 덧붙일 수 있습니다.
‘살면서 처음으로 내가 의지하고 어리광 부릴 수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부모님은 엄격하시고 저희 언니는 뭐든지 해내는 강한 사람이에요. 힘들다고 표현하는 건 나약하고, 나에게 하자가 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어요. 그래서 이전엔 힘들면 혼자 삭히곤 했습니다. 친구들에겐 늘 뭐든 괜찮은 모습만 보였죠. 드디어 이 사람이 있어서 힘들다고 짜증도 내고, 투정도 부렸는데. 내가 계속 부정적인 얘기를 해서 지친다고 떠나갔습니다. 역시 누군가에게 투정을 부리고 너무 의지해선 안 되는 건데. 다신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고 있어요. 이번 이별은 저에게 난생처음 어리광을 부릴 수 있게 해 주었지만, 다시는 그럴 수 없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나의 삶 속에서 이해하기
한 사람에겐 다양한 모습이 있습니다. 그중 ‘금지된 캐릭터’가 종종 생기곤 하는데요. 나쁜 행동, 약한 모습, 규칙을 어기거나, 중간에 포기하거나, 어리광을 부리거나, 게으르고 나태한 모습 등 가족과 내가 속한 사회로부터 ‘이래선 안된다’는 메시지를 꾸준히 받은 모습이 자연스레 금지됩니다. 하지만 금지된다고 사라지진 않기에 그것이 허락되는 순간 연인관계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연인관계에서만 발견할 수 있던 나의 새로운 모습이 있었다면, 그동안 알게 모르게 금지된 캐릭터였을 것입니다. 그런 관계를 잃어버리면, 오랜 시간 숨죽이다가 드디어 살 것 같았던 캐릭터가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 캐릭터는 곧 나의 일부분입니다. 정체성의 일부가 뜯겨 나가는 고통이죠.
이처럼 이별이 가지는 의미를 구체화하려면, 내가 그동안 살아온 삶에서 무엇이 부족했는지 돌이켜보게 됩니다. 금지된 캐릭터를 꺼낼 수 있었고 이별로 잃어버렸다면, 우리는 이별로부터 회복하자는 목표가 이렇게 정해집니다.
‘힘듦에 대해 나약하다고 여기는 부모님의 시선으로부터 분리되어, 힘듦을 표현함으로써 감정이 위로되고 신뢰가 깊어지는 긍정적 면들을 경험한다. 나 스스로 나약하다고 말하던 부분에 영향을 미친 과거를 탐색하고, 현재와 과거의 감정을 구분 지으며, 힘듦을 스스로 공감하고 위로하는 마음의 태도를 연습한다.’
잃어버린 의미를 다시 내 삶으로.
연애를 통해 얻던 것을 이별이 앗아갑니다. 물론 타인이 보내오는 공감과 위로의 따뜻함은, 스스로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매혹적입니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밥을 먹을 줄 아는 데 요리사가 떠나간 것과, 밥 짓는 법을 전혀 모르는데 요리사가 떠나가는 것은 차원이 다른 충격이지요.
스스로 밥을 짓지 못하면, 요리사에게 더욱 집착하게 되고, 절대 떠나가지 못하게 노력하고, 떠나갈까 봐 작은 갈등에도 불안해합니다. 우리는 무언가 부족함을 연인으로부터 채우고픈 마음이 있을 때, 그것이 외로움이든, 다정함이든, 경제력이든, 이별도 힘들지만, 만나는 동안에도 관계를 편안하고 느슨하게 유지하지 못하고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게 됩니다.
이별로 함께 떠나간 삶의 의미가 새로운 방식으로 내 삶 속에 자리하도록 해 주세요. 다음에 그 의미를 더해줄 누군가가 찾아왔을 때, 간절하기보다 감사하고, 떠나갈까 불안하기보다 그 순간에 머무르며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