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누가 또 안아줄 수도 있어요.

집요정의 하루 끝에서

by Minah
IMG_6502.jpg?type=w966 세탁기에 얼마나 넣어야 할지 몰라서 고민 중.


오늘은 항상 빠릿빠릿하게 돌아다니기만 하다가 큰 맘먹고 밀린 집안일을 하는 날이다. 집이 커서 구석구석 치울 게 많다.

먼저 방마다 진공청소기 돌려주기, 수건들만 모아서 흰 빨래 세탁기 돌리기, 아침 먹은 그릇들 설거지하기, 쓰레기 분리수거 하기,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베란다 식물 주기, 점심 식사 만들어두기. 은근히 할 일들이 많지만 일요일 아침은 이렇게 시작해야 기분이 좋다.

항상 모든 하루는 턴테이블에 Tom Misch 음반을 틀어두고 시작한다. 오늘 하루는 집요정으로 지낼 테니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한다.


IMG_6500.jpg?type=w966 수건만 돌리는 거라 혹시 몰라 세제는 아주 조금만 넣었다.


빨래에는 신기한 힘이 있는 것 같다. 결국 모든 청소는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항상 하고 나면 개운하고 기분까지 좋아진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빨래는 주로 직접 입고, 살에 닿는 것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유난히 각별한 기분이 들고 얼룩이 지워지는 과정에서만 느껴지는 희열이 있다.

매일 일상에서 입는 옷도 웬만하면 깨끗하고 좋은 향기 나는 상태로 입으면 하루의 마음가짐이 달라지고, 구김 없이 잘 다려놓으면 더 단정한 분위기가 난다.


IMG_6510.jpg?type=w966 햇볕에 바삭바삭하게 잘 마르기를.



브리즈번은 햇볕이 좋아서 이렇게 베란다에 빨래를 널어놓으면 몇 시간 만에 바삭바삭하게 마른다. 빨래들이 잘 소독될 수 있게 햇빛이 내리쬐는 쪽으로 빨랫대를 밀어 두고 크고 작은 화분들에 물을 준다. 일주일에 한 번 마시는 물이니까 잘 받아 마셔하는 좋은 마음으로.

식물도 다 살아있는 생명체라 그런지 아끼는 마음으로 잘 대해주면 더 잘 자라는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이 식물들의 생명을 책임지는 마음으로 혹시 잘못된 건 없는지 꼼꼼히 돌봐준다.


IMG_6521.jpg?type=w966 오늘의 메뉴는 흑미 유부초밥.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두고 거실이랑 방들을 진공청소기로 한 바퀴 돌려준 다음엔 내가 먹을 유부초밥을 만들었다. 조금 더 속도가 붙으면 더 빨리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직 나는 많이 느리다. 먹는 건 10분이면 될 것 같은데 이 단순한 메뉴를 만드는데만 30분은 넘게 걸리는 것 같다. 그래도 다 빠르다고 좋은 건 아니니까 아이 같은 마음으로 만지작만지작 거리는 순간들을 즐겨본다.

이렇게 사진으로만 요약해서 보면 큰 일 안 한 것 같은데 아침에 시작한 밀린 집안일을 다 끝내고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3시가 넘어가고 있다.

시간 정해두고 하는 거 아니니까 조바심 내지 말아야지.

IMG_6595.jpg?type=w966 마트 가는 길에 만난 정원


한바탕 집에서 쓸고 닦고 만들다가 이제 주말에 먹을 스테이크를 사러 마트 가는 길. 고기를 잘 굽는 편은 아니라서 사실 큰 기대를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내 버킷 리스트에 있는 소소한 목표들을 하나씩 하나씩 실천해보는데 의의를 둔다.

IMG_6655.jpg?type=w966 대체 우유의 종류가 엄청나다.


커피 마실 때 필요한 두유도 중간에 하나 사준다. 지금 보니 코코넛 밀크랑 캐슈넛 밀크, 오트 밀크 등 종류가 엄청 많구나.


IMG_6653.jpg?type=w966 시리얼 천국


용량이 너무 커서 살 수는 없지만 내가 너무 좋아하는 시리얼 코너도 괜히 서성거려본다. 이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달달한 코코팝스.


IMG_6672.jpg?type=w966 오늘의 장보기 목록


장바구니 들고 출발해서 야무지게 스테이크 먹을 때 필요한 가니쉬 재료들까지 사 왔다. 집안일만 잔뜩 했는데도 괜히 뿌듯했던 하루.

FullSizeRender.jpg?type=w966 2019년 9월의 기록.


침대에 누워서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다가 문득 예전에 써놓은 핸드폰 메모장을 다시 열어보게 됐다.

누가 또 안아줄 수도 있어요.라는 말은 2019년 한 해 내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었던 선생님이 나와의 마지막 만남 때 해주셨던 말씀이었다.


지금은 세상이 끝난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살면서 나를 안아줄 단 한 명의 사람을 잃은 것처럼 느껴져서 절망스러울 수도 있고, 앞으로 좋은 일, 기쁜 일, 행복한 일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함과 두려움, 불안감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누가 또 안아줄 수도 있다고. 그 전에도 그러했듯이.

어느 날은 다 버리고 떠난 게 후회가 되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그럴 때는 내가 얼마나 힘든 시기를 겪다가 결국 이 결정을 내린 거였는지 잊지 말고 떠올려보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할 정도로 살면서 그렇게 힘들었던 건 처음이었다. 부정적인 감정만큼은 주변에 퍼뜨릴 수 없어 혼자서 꾹꾹 눌러 담는 버릇이 있는 내가 눌러 담고 눌러 담다 모든 걸 놓아버렸고 팽팽하게 늘어나 있던 줄은 그대로 끊어져버리고 말았다. 반년을 혼자 버티고 버티다 결국 모든 걸 정리하고 떠나는 나에게 가족조차도 반대 한 마디를 하지 못했다. 내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다 지켜봤으니까.

아직은 기나긴 회복의 과정 속에 있지만 언젠가 그래 그랬었지 하는 순간이 꼭 왔으면 좋겠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 진짜 다 맞았네' 하면서 가볍게 웃을 수 있는 순간이.

내가 저 말을 절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은 이 말이 하고 싶어 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