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내가 좋아하는 카페가 문을 닫는다고 할 때.

오랜만에 먹는 호주식 브런치

by Minah
IMG_6749.jpg?type=w966 외출 전 마지막 루틴은 오늘의 내 모습 찍어두기.


Soba (요가 스튜디오)에서 운영하는 뒷마당 카페가 나의 No.1 장소이지만 오늘은 운동 후에 오랜만에 새로운 곳을 한 번 산책 삼아 가보기로 결심했다. 사실 좋아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질릴 때까지 파보는 편이지만, 오늘 가보려는 곳은 호기심이 생긴 특별한 계기가 있다.


나는 보통 요가가 끝나고 나면 마트에 들렀다가 장을 봐서 집에 오는데, 어느 주말, 수업을 같이 들었던 사람들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한 카페로 향하는 거다. 처음엔 이른 토요일 아침이었는데 운동 끝나자마자 어디를 가는 건가 싶어서 보게 됐는데 동네 주민들이 그냥 편한 옷 입고 주말 아침 모이는 방앗간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규모가 꽤 큰데도 편안한 느낌이 들어서 오늘은 그곳에서 호주식 브런치를 먹어봐야지 다짐하고 아침에 집을 나섰다.


IMG_6931.jpg?type=w966 오늘은 릴랙싱 한 meditation 수업 날.


브런치를 먹기 전에 수업을 듣고 가야 하는데 오늘 수업은 meditation이다. 이 수업 땐 항상 시작하기 전에 차를 준비해 주셔서 오늘 컨디션은 어떤지, 어떤 효능이 있는 차인지 그런 이야기를 먼저 나눈다.

이런 류의 테라피 수업은 주로 주말 아침에만 있어서 한 주 내내 바쁘고 고되게 끌고 온 몸과 마음을 주말엔 좀 풀어주는 느낌이 든다.


가끔 되게 마음에 드는 노래가 bgm으로 나오면 안대 낀 채로 담요 덮고 누워서 그 안으로 혼자 눈을 뜨고 흐뭇하게 웃고 있을 때도 있다.


IMG_6939.jpg?type=w966 손수 쓴 캘리그라피 음료 메뉴


수업을 마치고 카페 Plenty로 향했다. 입구만 봤을 때는 이렇게 큰 줄 미처 몰랐는데 안으로 들어오니 공간이 훨씬 컸고 계단을 올라가면 2층 공간도 나온다. 벽면마다 큰 칠판을 설치해두고 손글씨로 메뉴와 가격도 적어놓았는데 마음에 꼭 들게 너무 예쁘다.


어쩜 저렇게 제멋대로 쓴 것 같은데도 질서 있게 혼란할 수 있는지. 괜히 하나하나 메뉴를 다 맘 속으로 읽어본다. 그야말로 읽어보고 싶게 쓴 글씨다.


IMG_6942.jpg?type=w966 반대편 벽에는 식사 메뉴가 있다.


Plenty가 왜 동네 방앗간 같은 느낌일까 하고 살펴봤더니 음료 메뉴 말고도 브런치 메뉴가 정말 많다. 브리즈번 특성상 거의 아침 6시 반이면 카페가 다 오픈하기 때문에 이른 아침을 이 곳에서 먹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호주식 브런치는 오랜만에 먹는 거니까 직원에게 뭐가 맛있냐고 추천도 받아봤다.


IMG_6973.jpg?type=w966 But first, COFFEE :)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음식이 나오기 전 노트북으로 일기를 쓸 준비를 하며 커피 한 잔. 이 곳의 분위기는 뭐랄까. 아주 크고 넓은 나무 창고 같다.


격식이 없지만 친절하고, 모던하지 않지만 정이 가고, 자극적이진 않지만 대신 몸이 편해지는 곳. 아침에 편한 옷으로 언제든지 들릴 수 있는 곳이라 부담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수하지도 않다. 딱 저 칠판에 써놓은 손글씨 메뉴처럼 자기 색깔이 확실한 곳이다.


한 마디로 화려한 차림으로 가야만 대접받고 사랑받을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다. 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지 알 것 같다. 누구나 다 자기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기 원하니까.


IMG_6983.jpg?type=w966 호주식 브런치는 오랜만이다.


추천받은 메뉴인 런치 스페셜. 시금치, 감자, 옥수수, 페스토, 수란까지 겉으로 보면 단순한 재료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정말 맛있다. 그리고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바로 옆 오픈 키친에서 볼 수 있어서 그 기쁨도 굉장히 크다. 나중에 이런 브런치 종류 몇 가지 정도는 나도 스스로 만들어서 해 먹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IMG_7003.jpg?type=w966 플렌티 로고도 예쁘다.



Plenty를 좀 더 특별하게 만드는 건 이 곳이 현지 식재료를 공급받아 건강한 재료로만 음식을 만든다는 사실이다. 카페 입구에 Plenty, 'Know your farmer'라는 글이 같이 쓰여있는데 그 한 문장이 플렌티의 철학을 보여주는 느낌이다. 직접 계약한 농부들로부터 건강한 식재료를 공급받고, 가게 한 편에 직접 재료를 사갈 수 있는 데크가 있어 식재료를 따로 사갈 수도 있다.


좋은 제품을 알아보는 눈과, 그걸로만 음식을 해서 내놓는 애정과, 그걸 알아봐 주는 동네 주민(참새)의 조화가 이 곳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다.


IMG_7005.jpg?type=w966 스테인리스로 된 빨대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바로 이 빨대 키트다. 일회용 빨대를 쓸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굉장히 찝찝해지는데 빨대, 세척 브러쉬, 들고 다닐 수 있는 주머니로 구성된 키트를 보고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무려 6개 이상 들어있는 큰 키트로 샀다. 한 개씩만 사면 좋을 텐데 항상 좋은 걸 보면 소중한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늘 큰 손처럼 굴게 된다.


이건 언제나 가까이에 두고 쓸 수 있는 일상템이니까 사소한 일상 속에서 잘 활용하면서 내 생각도 덤으로 해주길 바라는 나의 작은 욕심일 수도 있다.

IMG_6960.jpg?type=w966 나의 작은 핸드폰으로 보는 전자책 앱 속 에세이.


마음이 흐뭇해지는 방앗간을 발견하고 집으로 돌아와 전자책 앱으로 누워서 책을 읽는다. 신간이 나오면 거의 가리지 않고 다 읽을 만큼 책과 신간에 대한 애정이 많은 나 같은 사람에게 해외에 나와서도 책을 볼 수 있는 전자책 앱은 소중하고 또 소중하다.


보통 책은 손맛으로 읽는 걸 더 선호해서 직접 사서 손가락으로 한 장 한 장 넘기며 종이 냄새를 맡는 기쁨을 맘껏 누리는 편이지만 이렇게 해외 나와있으면 일단 책을 구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으니까. 오늘은 책 <당신을 믿어요> (김윤나 님)을 읽는데 공감이 가는 부분들은 이렇게 바로 캡처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내가 가진 세상과의 심리적 거리는 몇 cm쯤 되는 걸까. 생각해보면 가끔 방앗간마냥 늘 익숙하게 들리던 카페나 추억이 많은 단골 공간이 사라진다고 하면 나는 생각보다도 아쉬움과 공허함을 크게 느끼는 것 같다. 워낙 하나만 파는 성격 탓이기도 하겠지만 왠지 '이제부터 얽혀있는 추억까지 다 사라지는 거다'라고 하는 선언 같다고 해야 할까. 이것조차 단순 의미부여일 뿐이라는 걸 잘 알지만 그만큼 정을 잘 줘서 인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은 물론이고 물건이나 공간에도 애착을 잘 형성하는 성격.

조금 더 심플하고 단순하고 만남에도 이별에도 쿨한 사람이면 좋을 텐데.


오늘처럼 좋은 카페를 발견한 것만으로 마음이 금세 행복해지고 마는 나이지만 건강한 거리감과 바운더리를 가져서 좀 더 씩씩하고 무딘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오면 '안녕, 반가워' 할 수 있고

가면 '안녕, 잘 가' 할 수 있는 그런 날. 오겠지?


마침 오늘 동네의 단골 테라스 카페가 8월 14일 자로 운영을 종료한다고 해서 아쉬운 마음에 끄적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