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비 오는 날의 카페 투어
오늘은 비가 내린다. 그리고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묘하게 빗 속에 풀과 나무, 흙냄새가 뒤섞여 꽃집에서 나는 냄새가 나는 것도 좋고 뭔지 모르게 세상이 조용해지는 그 순간도, 창문에 빗방울이 잔뜩 맺혀있는 것도 좋아한다.
예전에는 비가 오면 옷이랑 신발이 젖는 게 싫어서 방 안에만 있었지만 요즘은 우산 하나 들고 밖에 나가는 게 좋더라. 오늘은 별다른 계획이 없어서 비 내리는 날씨에 맞춰서 산책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곳에서 커피도 마셔야지 싶어서 나갈 준비를 마쳤다. 머리카락은 햇빛에 번져서 점점 더 밝아지고 있다.
땅이 촉촉하게 젖을 정도로만 비가 부슬부슬 내려오고, 저 멀리 플렌티가 눈에 보일수록 씩씩하게 걸어간다.
새삼 드는 생각인데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나, 어느 기분이 들었을 때 갈 곳이 있다는 건 (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하고 다행인 일이다. 이렇게 하고 싶은 말, 적고 싶은 글이 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고.
의외로 우리 중엔 막상 어디로 가서 위안을 받아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이렇게 낯선 땅에서 마음 붙일 곳이 있다는 건 (비록 일방적이라 해도) 정말 좋은 거다.
어쩌면 내가 찾아가 기대고 마음 눕힐 장소나 사람을 찾으면서 평생을 보내온 것 같다.
예전엔 콘크리트나 철재로 만들어져 모던하고 세련된 느낌을 주는 장소들을 주로 좋아했는데, 이제는 자연스러운 목재가 좋다. 쓰일 만큼 쓰이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사실도 안심이 되고, 차갑기보단 따뜻한 느낌을 주는 특유의 아늑함도 좋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나무에도 물이 조금씩 스민다.
안녕, 나 또 왔어.
오픈 키친인 플렌티는 식사류와 음료를 준비하는 장소가 각각 다르다. 바리스타가 예쁘게 라테아트까지 해서 직접 테이블로 커피를 가져다준다.
여유롭게 커피 마시면서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 구경도 하고 일기도 써본다. 그냥 오늘 내 마음은 어떤지, 요즘은 주로 무슨 생각하는지, 지금 있는 이 곳은 어떤 느낌인지. 가끔은 예전 일기들을 들춰보기도 하는데 결국엔 다 좋은 이야기만 쓰여 있더라.
그 당시엔 나름 힘들어하는 줄 알았는데 항상 그 상황과 사람과 주변 환경을 이해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충분히 쉬고 마시다가 천천히 도심 방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나가다가 괜찮은 가게의 인테리어를 보면 사진을 찍어두는데 Ballistic이라는 이 가게는 펍이라 내가 들어갈 일은 없겠지만 테라스를 알전구들로 예쁘게도 꾸며뒀다.
The Milk Factory라는 곳도 맥주를 파는 펍이다. 정원을 예쁘게 꾸며놔서 선선한 밤엔 밖에서 맥주를 마셔도 좋을 것 같은 느낌이다.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도심 중앙까지 왔다. 대형 마트인 울월스가 도심 버전으로 자그맣게 있는 걸 발견하고 들어왔는데 주변에 회사 건물이 잔뜩 있어서인지 마트 안에 커피를 만들어 파는 카페 코너가 따로 있었다.
깔끔하고 예쁘게 해 놨구나.
오늘의 주요 목적지로 왔다.
엄마가 불교신자 셔서 매년 한 두 번쯤은 나도 엄마를 따라 절에 가곤 하지만 이렇게 해외에 나오게 되면 역사가 있고 오래된 성당이나 교회는 한 번씩은 들어가게 된다.
특히 비 오는 날엔 가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잠시 잠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성전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토닥여주는 그런 느낌이다.
내가 늘 바라는 건 단 하나다.
함께 행복한 거. 서로로 인해 행복할 수 있는 거.
늦은 점심은 쌀국수 집에서. 그러고 보니 오늘의 코스는 전부 다 비 오는 날에 최적화된 곳들이다.
물론 맑은 날, 바람 부는 날, 선선한 날에 와도 다 좋겠지만 이상하게 비 오는 날 더 생각나는 곳들.
따뜻하게 밥을 먹고 에너지가 올라서 요가 스튜디오에서 입을 상하의 옷들을 좀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맥 카페에 들렀다. 직접 그려놓은 일러스트 메뉴판이 너무너무 맘에 들었다. 역시 글씨도 참 예쁘고 볼 일이다.
해가 지고 사람들이 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나도 나의 집으로 돌아간다. 생각해보면 입 밖으로 한국어를 내뱉지 않은지가 꽤 오래됐다.
다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해외에서 혼자 살고 있는 유학생이나 워홀하는 분들, 타지 생활하는 사람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꿈이 있고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기에 바쁘게 살아가느라 외로움 같은 거 느낄 틈도 없는 건지, 아니면 주변에 비슷한 또래나 동료, 룸메들이 있어서 같이 웃고 떠들며 버틸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의지할 곳을 찾아서 종교든 기타 등등이든 마음 편한 곳에 의지를 하는지.
나는 애정과 사랑이 정말 넘치게 많으면서도 내가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제 때에 옆에 있어달라는 이야기를 그 누구에게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늘 그 손길 한 번 내미는 게, 남에게 기대는 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모든 걸 다 혼자 버텨내고 지나가고 나서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아마도 처음 습관이 그렇게 들어서겠지? 누군가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어줄 순 있지만 나의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건 힘들어하는 것도 다 내려놓고, 함께 행복하면 좋을 텐데.
같이 행복한 건 이렇게나 단순하고 어렵다.
그래도 단 하나 스스로에게 당부하고 싶은 건 지나간 일들은 그대로 두고, 조금씩 조금씩 남에게 손길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도 되자는 것. 천천히 깨고 나오는 것도 괜찮다. 오늘은 그런 다짐을 해보는 날이었다.
이상하게 그런 날이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