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나의 열정은 다 어디로 갔을까?

기본으로 돌아가는 날들

by Minah
IMG_7021.jpg?type=w966 모닝커피 마시러 가는 길 :)


날이 아주 맑은 오늘은 모닝커피 한 잔 사들고 동네 산책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예전에는 살이 타는 게 싫어서 햇빛을 피해서 그늘로 도망 다니곤 했는데 브리즈번에서는 왠지 모르게 햇살이 기분 좋게 바삭바삭한 느낌이라 타면 타는 대로 그대로 두고 잘 걸어 다닌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많은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가며 살았던 적이 또 있었나 싶다. 여기 와서 햇빛을 굳이 피하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IMG_7022.jpg?type=w966 강변 따라 걷는 중


회사를 다닐 때 건강검진을 하고 나면 늘 비타민D가 너무 낮아서 80대 할머니의 평균보다도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하긴 회사에 창문이 없어서 밖에 눈이 오는지, 비가 오는지조차 모르고 살았으니 저 정도 수준이 나오는 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근데 의외로 햇살의 힘은 꽤 크다. 일단 빨래든 식기든 바싹 햇빛에 말리면 소독이 되는 기분도 들고 공기 중에 특유의 모래 냄새가 섞이는 것도 즐겁고 사람의 구김살도 펴지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다.

가끔 빨래 널다 보면 나도 같이 빨랫대에 올려놓고 마음의 축축했던 부분들을 바싹 말리는 상상을 한다. 노트북 충전할 땐 내 팔뚝에 충전기 꽂아두고 자는 사이 100%로 충전을 시키는 상상을 하고.

물론 나는 다양한 요인에 힘입어 충전이 되는 사람이지만 이렇게 이른 아침 모닝커피 한 잔 들고 햇빛 아래서 강변을 걸어 다니다 보면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IMG_7024.jpg?type=w966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보라색 나무.


예전에는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거의 눈 앞이나 땅 밑만 보면서 바쁘게 돌아다니곤 했는데 하늘을 보는 일도 잦아졌다. 예쁜 장면을 발견할 때면 사진으로 남겨두는 버릇도 생겼다.

근데 참 신기한 게 하늘도, 나무도, 꽃들도 다 원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날씨만 흐렸다 맑았다 할 뿐인 건데

왜 날씨 따라 마음 따라 그렇게 다르게 보였던 건지.

세상 살아가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다 비슷한 메커니즘인 것만 같다. 다 내 마음먹기에 달렸던 거고, 세상 어느 것도 상대방도 늘 그대로였는데 그냥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봤던 거다 나는. 아직 멀었구나.


IMG_7030.jpg?type=w966 the stores의 초콜릿 섹션


동네 한 바퀴를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엔 분위기 있는 the stores 가게에 가서 초콜릿 구경도 했다. 종류도 다양하고 패키지랑 이름이 예뻐서 찍어뒀는데 지금 보니 vegan / organic 제품들이구나. 나의 No.1은 Super dark다. 역시 다크 하다.

IMG_7055.jpg?type=w966 저녁 운동 가기 전 집 열쇠 들고.


매일 꼬박꼬박 빼먹지 않고 가는 스튜디오. 오늘은 필라테스 클래스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출발한다. 원래부터도 시간을 내서 스튜디오에 가서 운동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렇게 밤낮으로 매일 운동을 한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브리즈번 오기 전 몸 컨디션과 마음 상태가 굉장히 좋지 않았던 게 계기가 됐다. 내 나름 힘든 시간을 겪으면서 바닥을 찍고 난 후 열정이나 동기를 전부 다 잃어버렸다고 해야 할까.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 속에서 차근차근 밑바닥부터 단단하게 바꿔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IMG_7079.jpg?type=w966 비장한 마음으로 자리 잡고 앉은 클래스 시작 전의 나.


사실 단번에 마음의 독이 다 빠져나오는 건 아니다. 이 시간이 굉장히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운동하는 중간중간 잡생각이 들 때도 많고 어느 때는 항복 선언하고 그냥 그만두고 집으로 가고 싶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몸만큼 정직한 건 없고 공들여 쏟는 시간만큼 보상이 큰 건 없기에 천천히 숨 쉬면서 이 길을 오간다.


IMG_7081.jpg?type=w966 오늘도 잘 해냈다 :)


그렇게 스튜디오에 가면 늘 묵묵하게 오는 익숙한 얼굴들이 있고 늦은 시간에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 선생님이 있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더 튼튼해지자' 싶어 진다. 열정 넘치는 사람들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의욕이 조금 샘솟는다.

예전에 뭔가가 하고 싶다,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새벽이 되는 줄도 모르고 해야 할 일들을 하며 열정을 쏟아붓던 때가 생각났다. 라디오 하나 틀어두고, 스탠드 하나 켜 둔 채로 더 잘하고 싶어서 내가 스스로 좋아서 했던 시간들. 다시 찾아올 그 날들을 미리 대비하는 마음으로 나의 체력을 최상으로 끌어올려본다.

IMG_7096.jpg?type=w966 You are what you eat.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엔 내일 먹을 비빔밥 재료로 샐러드 믹스를 사 왔다.

다들 긴 터널을 지나갈 때는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궁금하다. 차곡차곡 쌓아온 나의 세계가 무너져 폐허가 되고 나면 다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하는지.

나는 그럴 때면 그냥 지금처럼 남은 폐허부터 비우고, 흔적과 먼지들을 정리하고 다시 처음부터 벽돌을 쌓아 올린다. 아직 예쁘지도, 어떤 기본적인 형체가 만들어지지도 않았지만 다시 만드는 나의 세상도 예쁠 거야. 또 다른 느낌으로 새롭게 지어봐도 좋은 거야.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