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집도 나름의 방식으로 나에게 말을 한다.

이사하던 날.

by Minah

오늘은 이사하는 날이다.

처음 브리즈번으로 떠나올 때, 최대한 많은 형태의 가구와 아파트, 주택 구조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랐고

그래서 머물 공간을 찾을 때까지 나름 많은 공을 들였다.


특히 처음 브리즈번 공항에 내릴 때까지는 첫 숙소를 딱 3주 잡아놓고 이후의 여정을 계획하지 않았었는데

지금 이 곳만큼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았다.


내가 3주 간 머물렀던 이 곳은 베란다와 부엌을 통해 늘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는 공간이었다.

원목으로 만들어진 부엌 덕분에 늘 눈이 편안했고, 뭐라도 요리해보고 싶게 만드는 그런 곳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엌에서 LP판 틀어놓고 커피를 만들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게 큰 행복이었고,

밤이 되면 거실 침대에 누워 티비를 틀어놓고 마음이 쉴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무엇보다 덕분에 마음 붙일 수 있는 요가 스튜디오 Soba도 발견할 수 있었다.

IMG_7625.jpg?type=w966 선물 받은 코닥 일회용 필름 카메라


떠나오기 전에 코닥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선물 받았고,

내가 브리즈번에서 가장 좋아하는 풍경과 장소만을 고르고 골라 찍어두기로 다짐했었다.

살면서 평생 기억에 남겨둘 그런 것들을.

일회용 카메라인 만큼 한정된 것들만을 담을 수 있다는 게 사람을 더 신중하게 만든다.


나는 나에게 많은 행복과 위안을 주었던 웨스트엔드의 집을 여러 장 찍어 두었다.

IMG_7627.jpg?type=w966 매일 낮과 밤 침대에 누워 실컷 베란다 식물도 바라보고, 야경도 바라봤다


새로운 동네를 돌아보고, 운동도 다니고, 산책도 하며 외부에서 보내는 시간도 길었지만

집 안에 있는 시간도 참 길었다.


그리고 낯선 해외에서 홀로임에도 집이 이렇게 편안하고 평화로운 공간일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앞으로의 나의 미래에도 집이 이런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은연중에 많이 바랬다.

있을법한 미래겠지?

IMG_7631.jpg?type=w966 도심 골목 속에 위치한 cafe Strauss


그동안 좋은 기운과 에너지를 줘서 고맙다고 마음속으로 집에 인사를 한 후에 새로 이사할 집 근처에 있는 Strauss 카페로 왔다.


브리즈번의 정신없는 CBD 안에 있으면서도 골목길을 찾아 찾아 들어가야 하는 곳.

커피와 카페 공간으로 호주에서 유명한 멜버른의 분위기를 닮았다고 한다. 골목 속 숨어있는 카페로 한 발 내딛으니 그게 어떤 말인지 알 것 같았다.


IMG_7633.jpg?type=w966 어김없는 소이 라테 한 잔.


3주를 머물렀어도 항상 짐을 싸서 이사를 가는 기분은 사람을 묘하게 만드는 것 같다.

꼭 사람만이 '언어'의 형태로 위로의 말과 가르침을 건네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 생각엔 공간도 나름의 방식으로 나에게 말을 한다.


떠나온 집이 나에게 해 준 말들과,

내가 그 공간에서 홀로 느꼈던 것들을,

적어두지 않으면 쉽게 잊어버릴 것만 같아서

일기장에 차곡차곡 손글씨로 적어두었다.


IMG_7635.jpg?type=w966 분위기에 걸맞게 맛있는 커피.


Cafe Strauss는 이렇게 혼자 시간을 보내기에 충분히 좋은 곳이다.

피크 타임인 점심 식사 시간만 피하면 충분히 여유롭게 신문을 읽을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아침에 짐 정리하고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이 곳에서 천천히, 편안히 쉬었다.


IMG_7636.jpg?type=w966 긴 테이블에서 보이는 뷰.
IMG_7639.JPG?type=w966 잘 마셨습니다!


도심 속 빌딩에 위치하고 있다 보니 실내 공간이 크고 넓은 건 아니지만 대신 분위기로 승부하는 곳.

중간중간 정장을 입은 직장인들이 끊임없이 커피를 테이크 아웃해서 나가는 걸 보니 이 곳은 CBD의 방앗간 중 하나구나 싶었다.

IMG_7647.jpg?type=w966 도심 속 야외 레스토랑 Santa monica pizza & burger bar



슬슬 배가 고파져서 지난번에 걸어가며 봐 뒀던 야외 레스토랑에 찾아왔다. 카페에서 먹는 브런치를 제외하고는 오랜만에 하는 외식인 것 같은데 이리저리 널어놓은 전구가 예뻐서 눈에 들어왔다.

IMG_7648.jpg?type=w966 애매한 시간대라 한산한 레스토랑.


이렇게 빌딩들이 많은 틈 사이로 1층에 야외 공간을 레스토랑으로 만들어 놨다. 메뉴판을 보니 비건이나 베지테리안을 위한 음식도 많고, 글루텐 프리 음식도 하나하나 다 표기해놨다.

IMG_7653.jpg?type=w966 이 곳에서 처음 먹는 듯한 파스타.
IMG_7656.jpg?type=w966 잘 먹겠습니다.

어쩐지 실패 확률이 낮을 것 같은 토마토 베이스 파스타를 시켰는데 사실 내 입에는 조금 밍밍했다.

이사 간 집에 가면 저녁을 한 번 더 먹을 것 같긴 하지만, 3주를 잘 보낸 기념으로 분위기 좋은 곳들만 찾아서 다녔던 오늘 하루.


벌써 3주가 지났구나. 시간 참 빠르다.

최근에 우연히 알게 된 어른이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다.

"우리는 10년 뒤로 가서 오늘의 이 결정이 옳았는지 아닌지 바라볼 수 없어요.

그냥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공교롭게도 오늘 연락이 온 친구에게 나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It's not your fault. OO님 탓이 아니에요."

수많은 선택들을 내리고 그 선택의 터널들을 걸어가고 있는,

젊은 날들을 보내는 우리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The story never en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