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먼 곳에서 찾은 나의 안식처

비타민 먹듯 하루치 행복 흡수하기.

by Minah

어제 그제 일이 터지고 난 뒤로 내내 정신이 없었다.

심리적인 타격이 큰 게 당연한 상황인데 꾹 참는 버릇이 있는 나는 그럴수록 정신을 제대로 붙잡으려고 늘 간절하게 노력하고 상황이 점차 진정되고 나면 그제야 몸이 조금씩 아프다. 바들바들 떨리는 기분.

이럴 땐 그렇게 좋아하는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냥 느린 음악을 틀어두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

IMG_7924.jpg?type=w773 오늘도 푸르른 브리즈번.


오늘도 맑은 하늘. 호주에서는 이렇게 드넓은 하늘, 드넓은 바다를 보다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사람의 마음은 하늘, 바다와 같아서 날이 흐리다 한들 그게 내 마음은 아니고,

파도가 거세다 한들 그것도 내 마음은 아니라고.

날의 흐림, 맑음과 상관없이,

파도의 거셈, 잔잔함과 상관없이

내 마음은 그 밑바탕인 하늘과 바다일 뿐이다.

나를 내가 느끼는 그 감정과 동일하다고 착각해선 안된다. 다 지나가니까.

IMG_7917.jpg?type=w773 인스타그램 @wearesoba


내가 너무 좋아해서 나 혼자 정신적 지주로 삼는 요가 스튜디오 Soba에서 운영하는 인스타 계정.

거의 매일 좋은 문구들을 일러스트와 함께 예쁜 폰트로 올려주는데 마음에 확 와 닿아 꽂히는 문장들이 종종 있다.


주로 보면서 드는 생각은 이런 것.

나쁜 마음 말고 사랑하는, 품어주는 마음으로 살자. 그리고 내가 가진 그 사랑에 당당하자.

정말 추천하는 계정이다.

IMG_7932.jpg?type=w773 소파 옆 탁상.


꽃이 좋아 꽃꽂이를 꽤 오래 배운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만지고 다듬은 꽃들을 항상 집으로 가져와 화병에 잘 담아두었는데 집에 꽃이 있으면 분위기가 새삼 다르더라.

집에 꽃을 둔다는 건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다는 뜻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꽃을 고르고 사서, 집에 와 다듬고 장식할 만큼의 여유.

푸릇푸릇한 화분들도 좋지만 언젠가 시들 것을 알면서도 사두는 꽃은 훨씬 더 의미가 크다.

IMG_8129.jpg?type=w773 브리즈번 CBD에 있는 Duce&Co. Espresso


브리즈번 카페는 보통 새벽 6시쯤이면 문을 열어 오후 3시면 문을 닫는다.

그래서 조금만 집에서 느긋하게 보내다가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데, (스타벅스, 맥도날드 같은 곳은 갈 수 있지만.)

오늘은 집에서 많이도 밍기적대다가 느지막이 나왔다.

CBD 근처에 있어 집에서 가깝고, 빌딩의 반지하층에 위치해 있는 Duce&Co. Espresso.

IMG_8132.jpg?type=w773 나 말고 손님은 단 한 명뿐.
IMG_8134.jpg?type=w773 이 작은 공간이 카페 공간의 전부다.

사람 10명 정도면 공간이 가득 찰 아기자기한 카페.

아무래도 업무빌딩들 틈에 있다 보니 바깥쪽 카운터에서 커피를 사서 테이크아웃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것 같았다.


작은 공간을 잘 살려 테이블 위마다 예쁜 전구로 빛을 밝혀주는 곳.

IMG_8141.jpg?type=w773 아이스 소이 라테
IMG_8143.jpg?type=w773 그런데 왜 항상 브리즈번 카페 얼음들은 이렇게 모양이 제각각일까?
IMG_8148.jpg?type=w773 결국 나만 남았다.


이 작은 공간도 결국 나만 남으니 충분히 큰 공간이 됐다.

가끔은 카페 와서 나 말고 다른 사람들 구경하며 하염없이 앉아있는 것도 좋지만

이런 날은 이렇게 조용히 나 혼자 시간을 보내면서 이 큰 공간을 누리는 것도 행복이다.

이럴 땐 가방에서 일기장을 꺼내 노래를 들으면서 오늘의 상태를 잘 기록해두곤 한다.

IMG_8158.jpg?type=w773 정말 이 공간이 카페의 전부다.
IMG_8183.jpg?type=w773 오늘의 포토 스팟에서.


어느새 카페 문 닫을 시간. (뒤에 대걸레를 본격적으로 갖다 놓기 시작했다.)

밍기적대다가 나오느라 제대로 식사를 못해서 맥도날드에 가서 햄버거를 먹을까 생각 중.

IMG_8192.jpg?type=w773 오지 앵거스 버거

우리나라에만 파는 불고기 버거가 있듯이 맥도날드는 나라마다 특화된 메뉴가 있다고 해서 메뉴판을 찾아봤더니 Aussie Angus Burger가 바로 그 메뉴인 것 같다.

IMG_8202.jpg?type=w773 사진이랑 다르잖아..


호주산 앵거스 비프로 만드는 패티인 것 같은데 지금도 정말 인상 깊은 게, 저 버거 정말로 퍽퍽했다.

쿠크다스처럼 바스락거릴 만큼 튀겨진 베이컨도 한몫한 것 같은 느낌.


그래도 첫 시도에 만족하고 잘 먹었어요..

IMG_8213.jpg?type=w773 운동하러 가는 길에 만난 예쁜 거리.


실컷 먹었으니까 저녁 운동을 하러 웨스트엔드로 가는 길.

이렇게만 보면 마치 자기 관리가 대단하고 운동 자체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 같지만,

호주 요가 스튜디오에서는 늘 그렇듯 자기 몸 상태에 맞게 운동하고 호흡하는 걸 가장 중요시하기 때문에

몸에 별로 무리가 안된다. 심리적 부담감 자체가 없다.

그냥 오늘도 풀밭에서 야외 요가하면서 선선한 저녁 바람맞아볼까 하는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임하는 것.

때로는 그런 가벼운 접근법이 사람에게 큰 위안을 준다.

뭐든지 '작정하고' 하면 너무 힘드니까. 시작은 가볍고 산뜻하게.


IMG_8217.jpg?type=w773 해가 지면 바람이 더 선선해진다.


그래서 이렇게 운동하러 걸어가는 길이 나는 너무 행복하고 좋더라. (버거 먹고 가는 거여도.)

이런 마음의 안식처는 언제나 찾고 싶고 갖고 싶다.


예전엔 그게 사람이었으면 했는데, 요즘엔 그게 공간인 게 더 나을 것 같다.

사람 관계는 늘 변하니까.


IMG_8219.jpg?type=w773 나의 안식처.


호주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건데 유독 야외 인테리어에 알전구를 많이 쓰는 것 같다.

덕분에 요가를 하다가 누워서 하늘을 보는 자세를 하고 있을 때는 하늘에 많은 별이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오늘 하루치의 행복도 운동하며 마음껏 흡수했다.


IMG_8234.jpg?type=w773 운동 마치고 사 온 것들.

다시 배가 고파서 오는 길에 사 온 모짜렐라 치즈와 디저트로 먹을 포도. 오늘은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써서 치즈 넣은 오믈렛을 만들어 먹어야지.


IMG_8236.jpg?type=w773 계란 & 토마토 & 시금치 & 라즈베리


마음 같아서는 여행 다닐 때 호텔 조식으로 먹은 치즈 오믈렛처럼 만들고 싶었는데 다소 괴리감 있는 비주얼이 나왔다.

그래도 뭐 먹을까 심도 깊게 고민하면서 장보며 재료도 내 손으로 고르고, 부엌에서 이렇게 저렇게 칼질도 해보고, 모양도 잡아보고, 이왕 먹는 거 예쁘게 담아 먹자 싶어 요리조리 고민하는 순간이 즐겁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최선을 다하되, 너무 많은 거 바라면서 살지는 말자' 하고 다짐하지만

늘 내 맘 같지 않게 흘러가는 게 나의 하루하루.

잘 이겨내 보자 해봐도 가끔은 지고 만다.

그런 나에게

내 마음의 안식처들은 늘 안식처로 남아주길 기도하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