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24
날이 밝았다. 오늘은 호주에서의 첫날이 되겠다. 단단하게 채비하는 마음으로 아침 기내식을 든든하게 챙겨 먹었다. 비행이 끝나가는 게 느껴지니 어딘가 싱숭생숭한 기분은 왜 인지 모르겠다. 호주에 가고 싶은데, 아직은 가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든다. 내 몸은 가고 있지만 마음은 태평양 한가운데 어딘가에 멈춰섰다.
도착해보니,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비가온다니. 비가 내린 다는 건 보통 나쁜 징조가 아니던가? 그런 내 마음을 달래주는 건지, 저 멀리 yes라는 문구가 보인다. 이걸 보자 마자 생각한건 '아, 뭐든 잘 되겠구나' 였다. 왜 인지 모르겠지만 그 어떤 환영인사보다 yes는 내게 밝은 기운을 건네주었다. 어쩌면 '예스맨'처럼 '예스걸'이 되라는 신호일지도 몰라.
무엇때문에 여기에 온 건지 물으면 어떻게 답해야할지 준비하고서 입국 심사를 통과하려고 보니, 시드니 공항의 입국심사는 전산화가 되어 있었다. 영어로 한 마디 인사도 나누지 않고 입국심사를 통과했다. 지금, 내가 입국을 한게 맞나? 이런 입국심사는 처음인지라 얼떨떨하다.
체감이 언제 되려고 이러는지, 그냥 흘러가듯 어느새 시드니의 중앙역에 도착했다. 도착해보니 12시다. 백패커스 체크인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다. 백패커스 옆의 카페에 앉아 강의를 듣는다. 낯설을 기색도 없이, 출국 준비를 하느라 밀려있는 학점은행제 강의를 들어야만 했다.
햄치즈 크로와상을 하나 시켜보니 호주의 물가가 체감되기 시작한다. 이런 샌드위치가 10불을 금방 넘긴다. 샌드위치 하나에 만원가량이라니. 꽤나 차림새 있는 브런치는 30불 이상이다. 그래도, 기대하지 않고 먹었던 샌드위치가 꽤 맛이 좋다.
체크인을 하고 우선 전자기기 충전부터 한다. 강의를 더 들어야 한다. 호주 생활 걱정은 할 새도 없이 밀린 강의가 나를 압박한다. 정신없는 사물함의 풍경이 어쩐지 마치 내 지금 상태 같기도 하고.
중앙역 앞의 CENTRAL YHA에서 묶게 된 나는, 시드니의 첫인상에도 꽤나 놀랐다. 이런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있을 줄은 몰랐다.
맞다. 나는 거의 아무런 정보도 없이 호주로 왔다. 내가 오늘 알아야 할 정보는 딱 하나. 울월스나 콜스 같은 마트에 가서 선불 유심을 사야 한다. 그런 필수 생활 정보 말고 호주에 대해 아무것도 찾아보지 않았다.
그러니 보이는 풍경에 꽤나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유럽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다. 이 순간만큼은 또 여행에 온 것 같은 설렘이 찾아온다.
심을 사고 도서관에 갔고 그때부터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백패커스의 같은 방에는 낯선 외국인들이 다섯 명 있고, 그 중에는 영어가 서툰 아시아인 조차도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웃기지만 영국인 세 명, 독일인 두 명과 함께 같은 방을 쓰게 됐다. 유러피안 사이에 낀 홀로 아시안. 마트와 도서관을 찾기 위해 걷던 거리에서 보였던 동양인은 말소리를 들어보면 죄다 중국인이다. 속해 있을 데가 없어졌다. 호주가 체감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살인적인 물가가 벌써부터 느껴진다. 식사는 제대로 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 수나 있을까? 영국인들과 같은 경쟁선에서 시작해서 내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급격히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지금까지도 혼자였는데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고독함이 나를 감쌌다. 내가 이 생활을 잘 할 수 있을지, 그런 불확실함이 나를 에워쌌다. 나는 그렇게 더 바닥으로, 더 바닥으로 꺼져만 갔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되겠다. 결단을 내렸다. 한국인을 아무나 찾아서 말을 걸면 나아질 성싶다. 샌드위치를 하나 사서 백패커스의 식당에 앉았다. 이 큰 건물에 묵는 한국인이 설마 나 하나일까? 누구라도 하나는 물가가 비싼 호주에서 이 주방을 이용하겠지.
그리고 만났다. 나의 호주 생활 첫 메이트들. 지나, 주디. 우리는 모두 이제 시작이다. 집도, 직장도, 가족도 없는 이곳에서 새롭게 시작해야만 한다. 당장 집 구하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집 구해놓고 나면 돈도 벌어야 할텐데. 그런 문제들이 겹겹이 쌓여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이야기하다가도 그런 문제들로 이야기가 종종 샜다.
딱딱하고 움직일 때마다 아래 층 사람까지 흔들리는 이층침대에 누워 있자니 이 숙소에서는 얼마나 지내게 될까 싶다.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오늘은 반가운 얼굴들을 만난만큼 그냥 하루를 웃어 넘기기로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