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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배 Zoe Jul 28. 2023

이미 늦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22-10-26


어제 사장님께 약속했었다. 오늘 다시 카페에 들르기로. 그래서 오늘 8시에 카페에 방문했다. 아니, 늑장을 부리다가 10분 늦었다. 호주는 아침 6시면 웬만한 카페가 다 문을 연다. 회사에 가는 직장인들이 출근 전에 들린다. 그래서 이때가 가장 바쁘다. 어제 1시가 넘어 방문했을 때는 여유로워서 사장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오늘은 한마디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눴다. 사람들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끊임없이 들어온다. 이제 좀 여유로워지려나 싶어지면 어김없이 다음 손님이 들어왔다. 사장님은 한시도 쉬지 못하고 커피를 내리셨다. 예상 못했다.


그래서 나는 카페에서 중고차를 계속 알아보고 인스펙션을 잡았다. 인스펙션이란 차량 상태를 점검하고 거래를 진행하기 위한 약속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호주는 개인 직거래를 위한 플랫폼이 잘 만들어져 있다. 자동차 딜러에게서도 살 수 있지만 개인직거래가 더 저렴하다.  지금은 중고차 값이 올라서 딜러에게 구매하는 건 나 같은 워킹홀리데이 노동자는 꿈도 못 꿀 일이다.


한국에서 차를 몬 지 3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차알못인 나는, 계속 차량 점검을 공부했다. 그러다 문득 만약 인스펙션에서 정말 마음에 드는 차가 생긴다면, 당장 끌고 오게 될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급하게 한인 운전연수학원에 연락해 약속을 잡았다. 결과적으로 한인분께 운전연수를 받은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호주는 차를 오래 타는 사람들이 많고 그만큼 차량 관리도 철저하게 한다. 그래서 연식이 20년 가까이 되는 차인데도 가격이 6,000불을 훌쩍 넘긴다. 하필 지금 환율도 높아서 920원에 환전을 했다. 중고차만 550만 원, 운이 좋아서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자동차를 만나길 바랄 뿐이다. 그런 행운이 내게 자꾸 깃들기만을 바라고 있다.



차량 연수 약속시간이 다되어서 이동한다. 오늘 날씨가 정말 좋다. 호주의 하늘이 대단하다는 소리는 익히 듣고 왔다. 쨍쨍 내리쬐는 햇살에 나뭇잎의 초록이 찬란하다. 정말 푸르른 날이다.




시드니에는 가장 큰 한인촌이 있는 지역이 있다. Strathfield, 스트라스필드. 이곳은 여러 트레인이 정차하는 환승역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사실은 몰랐다. 뭔가 굉장히 멋진 곳일 것 같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이름만 들으면 스타필드 같은 거대한 복합공간이 있을 것 같지 않나?



스트라스필드는 환승역인 만큼 열차가 자주 다니고 급행열차로도 갈 수 있다. 나는 구글맵에서 알려주는 대로 T9 급행을 탔고 스트라스필드에서 내리는 걸 놓쳤다. 대여섯 역을 지나치고서 겨우 내릴 수 있었다. 약속시간이 다가오는데 손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지나치는 풍경들은 한적하다. 시티 중심에서 고작 20분쯤 나왔을 뿐인데 온통 주택이다. 마음은 소란스럽고 풍경은 고요하다. 그러면 내 마음은 점차 고요를 따른다.



다행히 내가 조금 서둘러 출발한 덕에 약속시간에 늦지는 않았다. 스트라스필드 플라자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저 앞에 보이는 건물이 플라자다. 생각보다 아담한 사이즈다.




자동차 연수는 굉장히 어려웠다. 운전을 오래 했다 보니 더 어렵게 느껴졌다. 나에게 운전은 그저 습관일 뿐인데 무의식으로 운전하다 보면 이곳에선 다 틀린다. 호주는 좌측통행의 나라다. 영국의 영향을 받아 그렇다.


좌측통행은 운전대가 오른쪽에 있다. 깜빡이와 와이퍼의 위치도 우리와 반대라 나는 진짜 초보운전처럼 여러 번 와이퍼를 켰다. 여기는 우회전을 할 때 신호를 받아야 한다. 신호등은 머리 위가 아닌 도로 바깥쪽에 있다. 제일 헷갈리는 건 교차로(Round about)다. 시계 방향으로 돌아야 한다. 교차로를 돌고 나서 왼쪽 차선으로 진입해야 한다는 것도 헷갈린다. 운전연수 1시간을 하면서 벌써 역주행을 했다. 강사님이 있어도 하는데 없으면 어떨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도 호주는 교통법규가 아주 철저하다. 강사님도 몇 번을 강조했다. 교차로에 차가 돌고 있다면 절대 진입하지 말라고. 깜빡이를 켜고 있는 차의 진행 방향이 나와 다르다면 지나가도 되지만 그냥 우선 교차로에서는 멈추는 게 좋다고 한다. T자형 삼거리(T junction) 구간에서도 큰길 차가 무조건 우선이다. 이렇게 서로 간의 약속을 제대로 지킨다는 걸 1시간 운전하면서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보인 문구다.

NEVER TOO LATE.


운전연수를 받고 한참 허둥지둥 정신이 없었는데 마음이 편안해진다. 공무원 생활을 접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시작은 두렵다. 아무것도 모르는 걸 배우는 일은 언제나 어려움을 동반한다. 하지만 배우면 반드시 무언가 얻게 된다. 늦었다고 생각하며 계속 한국에 남아있었을 나와, 늦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호주에 온 나를 생각해 본다.


오늘은 인스펙션 약속을 잡느라 차 주인들과 통화를 하고, 같은 방 영국 여자애들과도 대화를 나눴다. 뱉기 전에는 두려웠던 영어가 그리 겁먹을 것 없었단 걸 알게 됐다. 안 들리는 영어가 많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살아간다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을 것 같단 막연한 희망이 피어오른다. 지금 시작하는 나이기에 이 정도 서투름은 충분히 덮고 넘어갈 만하다.


위태로운 게 마치 솜사탕 위를 걷는 것 같지만 어쩌면 하늘 위의 구름에 선 것도 같다.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들과 생각들이 다가오고 있다. 이 새로움들이 나를 자꾸 붕붕 띄운다. 나는 지금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 준 불과 몇 달 전의 내가 너무 고마워 한껏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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