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29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옮긴 백패커스에 짐만 맡겨두고 나오는 길,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빨간색과 파란색 무늬에 검은색 바탕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던 쏘야는 한눈에 보기에도 인상이 하얗고 부드러웠다. 어쩐지 말을 잘 받아줄 것 같았다.
정말로 쏘야는 나의 스몰토크를 잘 받아줬고, 우리는 서로의 목적지를 따라가다가 아무도 목적지가 없었단 걸 알고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쏘야는 호주 생활로 3개월쯤 된 선임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세컨드 비자를 따고 이제 막 넘어오는 길이란다. 서로 이곳에 오게 된 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는 나이가 얼추 비슷한 또래였다. 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우리는 고향이 같았다. 여기서부터 조금 신기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인구가 30만이 안 되는 중소도시가 고향이다. 5155분의 30의 확률로 같은 고향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 이 시드니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놀랄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우리는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 학창 시절 얼핏 본 얼굴이었단 걸 알게 됐다. 겹쳐서 아는 친구들이 한 두 명쯤은 있다.
서로 말도 안 되는 우연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게 도대체 얼마의 확률을 뚫으면 가능한 일이란 말이지? 한국에서 그냥 길을 걷다가도 동창을 만나는 것도 어려운데 이 먼 타국에서 만나게 되다니. 아직 오늘을 시작한 지 몇 시간 되지 않았는데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우선 쏘야는 약속이 있었고, 나도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기에 연락처를 주고 받고 서로의 길을 떠나기로 했다.
쏘야를 만나기 전 아침의 일이다.
3시간 반쯤 자고 체크아웃 준비하려 일어났는데 아침식사를 1시간 동안 하느라 허둥지둥 대며 나오게 됐다. 아침마다 참, 정신이 없다. 시드니 중앙역 바로 앞에 있던 CENTRAL YHA에서 더 팟 시드니로 이동한다. 한국인들 사이에서 더 팟 백패커스가 평점이 좋았다. 하지만 내가 이동하는 이유는 평점 때문이 아니다. 이 무거운 짐을 가지고 굳이 이동하는 수고를 원하지 않았다.
CENTRAL YHA에 빈 침대가 없다. 주변에 꽤 괜찮은 백패커스가 다 매진이다. 이것 때문에 지금 나의 백패커스 친구들은 골머리를 앓고 있다. 다음 숙소를 아직 구하지 못했는데 임시로 묵을 숙소조차 방이 없다니. 대충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아마도 단체로 들어오던 학생들 때문이 아닌가 싶다. 수학여행을 떠나온 학생들 같아 보였다. 그 때문에 시드니는 지금 관광 성수기인 듯싶다.
쏘야와 헤어지고 점심을 먹으러 푸드코트 같은 곳을 들렀다. 시드니 중앙역에서 중국인들의 말소리가 많이 들려왔던 건, 중앙역 바로 옆에 차이나타운이 위치해서였다. 우리 같이 가난한 워홀러들에게 중국음식점은 저렴하고 좋은 한 끼가 된다. 태국 여행에 가서 가장 맛있게 먹었던 농어튀김을 기대하고 시켜봤는데 비슷한 듯 다른 맛의 음식이 나왔다. 민물 맛이 좀 난다. 태국인이 아닌 중국인이 운영하는 태국 음식점이라서 그런가?
중앙역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을 찾다 보니 이 달링스퀘어 도서관이 나왔다. 도서관이 꽤 크고 공부하기 좋다. 첫날에 내 심장이 떨어진 곳이 바로 이곳이다. 나는 여전히 해야 할 공부가 많기에 도서관에 가려했지만, 다음 약속 시간이 다가온다. 도서관에는 발도장만 찍고 나온다.
숙소가 없어 골머리를 앓던 중이었는데 어제 샌디언니가 단기숙소를 안다며 소개해줬다. 한인 분이 운영하는데 방이 괜찮다고 한다. 그 덕에 주디와 함께 숙소 걱정을 덜었다. 드디어 짐을 좀 편하게 풀어볼 수 있나 하는 기대도 된다.
시드니는 도심 한가운데도 이렇게 녹음이 짙다. 초록색을 자주 봐서 마음이 이렇게 금방 편안해졌는지도 모른다.
이제 며칠 후면 시티 중앙을 벗어날 예정이다. 그래서 주디와 나는 본다이 비치로 향했다. 시티에서도 꽤 거리가 있는 곳이다. 수영을 하겠다기보다 그저 구경을 하러 왔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인파가 장난 아니다. 그런데 이곳은 사진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본다이 비치는 정말 조용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 말을 하고 장난을 치고 놀고 있는데 평화롭다. 뭔가 신기한 세상에 들어간 듯한 기분이었다. 세상의 소리를 흡수하는 장치가 어디 달려있는 건 아닐까 싶었을 정도다.
그래서 그 한적함을 누리며 우리는 쉬어가는 시간을 가졌다. 노릇노릇한 기분이 든다. 수많은 사람들의 소리가 잔잔해서 꼭 우리만 존재하는 것 같다. 초록 잔디에 누워 바닷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치 청춘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해변가를 조금 걸었다고 배가 고파졌다. 아직 저녁을 먹기엔 이르지만 주디와 자리를 이동했다. 시티에 구글 평점이 좋은 피자집을 찾았다. 이렇게 멋진 인테리어 덕에 평점이 좋았던 걸까?
평점이 좋은 만큼 사람이 많았다. 배가 많이 고팠던 우리는 고민을 하다가 피자 한 판을 먹기로 했다. 그런데 피자 한 판과 음료를 주문하니 서버가 지금 해피아워라 피자는 조각으로, 음료는 맥주를 시키는 게 더 좋다고 말한다. 가격이 어쩌고 말을 해줬는데 잘 안 들려서 우선 피자 두 조각과 맥주 한잔을 시켰다. 사실 들었는데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우선 결제해 보자 하고 시켰다.
그래서 받게 된 이 음식들의 가격이 6달러다. 5시가 되기 전까지 해피아워로 50퍼센트 할인가를 선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믿을 수가 없었던 거다. 호주의 물가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가격의 음식이다. 신이 난 주디와 나는 피자 두 조각과 맥주 한잔을 더 시켜 먹었다. 그러고도 총 15달러를 지불했다. (3달러짜리 소스도 하나 시켰기 때문에) 15달러면 웬만한 1인 식사 가격이다. 15달러면 주말에는 식사가 어려울 때가 많다.
주디와 나는 말도 안 되는 행운을 얻었다며 신이 나서 나왔다. 피자 덕에 배는 든든히 부르고 맥주덕에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본다이비치부터 지금까지 묘하게 특별한 하루가 벌어지고 있는 거다.
시드니의 달링하버라는 부둣가에서는 토요일마다 불꽃놀이를 한다. 우리는 오늘의 마무리로 그 불꽃을 보러 갔다. 할로윈을 앞둔 주말이라 그런지 코스튬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수많은 확률 속에 산다. 머나먼 시드니에서 나는 우연으로 인연들을 만났다. 같은 기간에 백패커스에 묵게 돼 주디와 지나, 쏘야를 알게 됐다. 그 많은 수업 중 샌디언니를 같은 강좌에서 알게 됐다.
수많은 주말 중 할로윈을 앞둔 주말이었던 덕에 코스튬을 한 사람들을 보기도 했고, 우연히 찾은 피자집의 해피아워에서 행복한 식사를 할 수도 있었다.
그 이전에 내가 여러 나라들 중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결정하게 된 확률도 생각해 보게 된다. 워킹홀리데이를 결정하지 않았더라면 이직이라는 선택을 했었을 거다. 그 모든 확률을 따져보면 지금 일어난 모든 일이 기적과도 같다. 로또에 당첨되는 게 이보다 더 쉽지 않을까?
수없이 많은 확률로 엮어진 시드니에서의 순간들이 마치 불꽃놀이처럼 내 혼을 쏙 빼놓는다. 나에게 이런 순간이 주어졌다는 게 믿을 수 없다. 그런만큼 나의 지금이 어떤 수식어로도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찬란하고 근사하게 다가오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