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09, 발걸음이 닿는 방향은 얼마든 바꿀 수 있으니까
어제는 구직활동에만 매달리지 않는 하루를 보냈다. 마음을 편하게 먹고 이력서 몇 장만 넣었는데 인터뷰 전화를 받았다. 처음에는 무슨 얘기를 하는지 잘 안 들렸지만 통화 몇 번 하다 보니 묻는 질문이 거의 비슷하다. 알아듣기 힘든 문항도 있었지만 덕분에 감으로 대답했다.
어제는 놀다 오려했는데 편지를 쓰다 보니 오후가 다 가있었다. 소피에게 배운 내용을 사랑에게 꼭 전달하고 싶었다. 소피와 나는 마치 영혼의 단짝을 만난 듯했는데, 그 핵심에는 책이 있었다. 어떤 운명이 내게 미소 짓는지 모르겠으나, 마침 소피와 대화를 나누던 날 고전문학의 중요성에 대한 글을 읽었었다.
시카고 대학은 설립되고 30년간 삼류 대학은 전전했었다. 그러다 학생들에게 100권의 세계 고전책을 읽게 했고, 그 후 100년이 지난 지금 97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교육 방식에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인문고전을 탐독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소피는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통찰력이 대단하다. 소피는 그 모든 일들이 가능한 이유를, '독서를 통한 인간이해'라고 내게 설명했다. 그래서 어제는 도서관에 가서 대출증을 만들었다. 이북을 자주 이용하지만, 종이책의 읽는 맛 또한 매력적이니까.
오늘은 아침에 러닝을 좀 다녀왔다. 굴다리 같은 곳에서 발걸음 소리가 정말 큰 아저씨 한 명을 만나 놀라 줄행랑을 친 거 빼고는 기분 좋은 러닝이었다. 그렇게 얻은 에너지로 소소한 여행길을 떠난다.
시드니에 자카란다 명소가 여러 곳 있는데 그중 시드니 대학은 손꼽히는 자카란다 풍경 맛집이다. 해리포터 촬영지였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매력적이다.
시드니 대학은 뉴타운에 위치해 있다. 이 뉴타운은 마치 우리나라의 홍대 같은 이미지를 하고 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예술가들의 풍취가 흐른다.
신기한 건물이 다 있다. 하나의 건물에 이렇게 제각기 지붕을 가진 집이라니, 아마도 호텔일 거라고 짐작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로는 호주의 원주민들(aboriginal)을 교화할 목적으로 저런 작은 집에 가두다시피 해서 살게 했다고 한다. 신기하다고만 생각했던 저 건물에 얽혀있을 이야기와, 어려있을 한을 가늠해 본다.
주택가의 정원은 교외지역보다 작지만 그 앞으로 꼭 꽃나무들을 뽐내 보인다. 꽃 향기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코를 박고 향을 음미해 본다. 나는 이 향을 트로피컬 하다고 느낀다. 뜨거운 지역에 갔을 때 종종 맡던 향기다.
시드니 뉴타운에는 남반구에서 커피가 가장 맛있는 곳이라고 정평이 난 캄포스 커피 본점이 위치해 있다. 캄포스의 커피는 유명한 만큼 길을 걷다가 캄포스 원두를 사용하는 카페를 자주 보게 된다.
구글 리뷰에서 아포가토를 많이들 시켜 마시길래 나도 동참했다. 가만 앉아 카페를 바라보니 아이스크림 통 쌓이는 속도가 대단하다. 맛은 있었지만 아이스크림의 달달함 때문에 커피 만의 향이 잘 느껴지지 않는 건 아쉽다.
나는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에 이곳에 와서 여유롭게 컴퓨터를 사용했지만, 붐비는 오전에는 바 자리에서만 사용해 달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점심 먹고 나서 오히려 카페가 한산하다니 우리와 정말 다르다. 이렇게 유명한 카페도 오후 4시가 마감시간이다.
자카란다 구경도 하고 시드니 대학교 도서관에 가서 공부도 했다. 집중하고 보니 해가질 시간이 다 됐다.
이런 대학에서 공부하는 기분은 어떨지 궁금했다. 어떤 도서관을 가도 마찬가지인데, 호주는 도서관에서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 않다. 공부에 필요한 이야기라면 언제든지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렇다고 도서관이 아주 시끄럽지는 않다.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배려를 갖춘 대화소리가 들려온다.
호주에 오고부터 10시를 넘기면 하품이 자꾸 내 밤을 방해한다. 거의 매일을 만 보 이상 걷고 있으니 당연히 그럴법하다. 걷는데서 느껴지는 자유로움이 발걸음을 더 가볍게 하고 결국 이만큼씩 걷고 만다.
오늘 공부에서 배운 내용 중 "Here and Now"가 있다. 이미 일어난 어떤 일도 원상태로 되돌려 놓을 수 없고, 단지 현재에 대해서만 수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중에 구직하느라 쩔쩔매는 지금을 떠올린다 해도 수정할 수 없을 테니, 지금에서 내 발걸음의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내 인생의 여정이라는 책의 책장을 한 장쯤은 넘겨보았노라 생각하며, 작은 여행길에 떠나길 정말 잘했다고 오늘을 마무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