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22, 세상을 매섭게 째려보다가요
장장 이틀이 걸렸다. 웨어하우스에서 만난 한국인 코워커 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돌리고 돌려서 풀어 설명하는데 중간 휴식시간 15분, 점심시간 30분을 내내 쏟아부었다. 고작 4일 봤을 뿐이지만 나는 션이 스스로를 꽤나 밀어붙인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발전을 할 수 없다나?
분명 부정적인 감정들이 어떤 기폭제가 될 때도 많다. 모두에게 그렇다고 단정 지을 순 없지만, 난 부정적인 감정을 안고 나아갈 때 그 기운에 눌려 무너진 적도 많았다. 이제 곧 새로운 곳에 갈 텐데 거기서 혼자 스스로를 몰아세울 션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그걸 도저히 가만 둘 수가 없었다. 난 좀 오지라퍼이기 때문에.
오늘은 일 끝나고 주디를 만났다. 우리 주디는 말랑 콩떡 같은 겉모습을 가진 데다 말하는 것도 굉장히 푹신하다. 하지만 가끔 아주 딱딱한 걸 느낄 수가 있다. 주디는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차있는 투명한 유리 안에 있는 듯 했다. 둘러싼 유리막이 부서질까 단단히 고정하고 있는 주디가 보였다.
다행히 우리 사람에겐 유리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법이 없다. 그래서 션도, 주디도 아주 말랑한 겉과 속을 만들어 주고 싶은 것이 내 요즘 과제다.
션이 마침 좋은 질문을 던져줬다. Core Value(핵심 가치)가 뭔지 묻는다. 처음 질문을 받았을 때는 그걸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이상한 답변을 했다. 요즘 건강하고 바르게 사는 거에 관심이 많아서 "바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하면서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다 내가 쫓고 있는 진짜 핵심을 알아냈다.
내 핵심가치는 다정이다
고슴도치들의 세상에서 나도 가시를 삐쭉 세우며 살았던 때, 모든 세상이 다 가시처럼 보였던 게 불씨가 됐다. 만약 내가 고슴도치인 채로 호주에 왔다면 나는 아마 소피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을 거다. 어딘가 또 다른 고슴도치로 여기고 말았을 테지.
나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합석을 제안할 만큼 E의 성향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게 타고난 성질은 아니다. 어릴 적 나는 아주 얌전하고 조용한 아이였다.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게 부끄러워 먹고 싶은 음식에 손도 못 뻗는 아이였다. 그때 못 먹은 치킨이 얼마나 서러웠던지 나는 그 기억을 아직도 품고 있다. 서러운 마음이 나를 이렇게 바꾸었는지는 모르겠다. 치킨 한 조각쯤은 내 손으로 뻗어 쟁취하고 싶었을까?
지금은 누굴 만나든지 명랑하게 맞이할 수 있지만 그것도 타고난 성품은 아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무섭게 생겼다는 말을 항상 들으며 자라왔다. 내 마음에는 손도 못 뻗는 부끄러운 아이가 자라고 있었는데 무섭게 보인다는 인상은 나를 자꾸 더 안쪽으로 숨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타고나길 경계하지 않고 순수하던 아이가 있던 터라, 사람에 속고 당한 경험이 많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세상을 째려보며 살았다. '나를 더 속이기만 해 봐라, 내가 다 잡아먹고 말지.'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았다. 세상과 사람들에게 지기 싫었다. 누군가 나를 이용해 먹을 것만 같았다. 그걸 절대 용납할 수가 없어 두 눈에 불을 켜고 살았다. 하지만 그 날카로움은 결국 돌고 돌아 나에게 부메랑처럼 꽂혔다.
사랑을 알고서 나는 변했다.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변한 건 아니다. 그 사랑을 닮고 싶어 변했다. 모든 이들에게 웃음 지으며 아무런 방어자세도 취하지 않는 이는 사랑스러웠다. 두 팔 벌려 꼭 안아주는 품이 얼마나 따뜻한지 알게 됐다. 그런 이는 당연하게도 주변에서 사랑을 듬뿍 받았다. 사랑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 사랑하고 싶어서 나도 내 품을 열었다.
나는 타고난 성정이 그리 다정하진 않다. 하지만 내가 변하고 싶었던 모습으로 지금 바뀐 만큼 이것도 내 핵심가치로 두면 천천히 그 모습으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베푼 다정이 그 사람을 말랑하게 만든다면, 그 너그러워진 모습으로 누군가에게 다정을 전하고, 그 다정이 또 번지고 퍼져 도미노처럼 다정이 전달되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 뜬구름 잡는 소리일지 몰라도 그렇게 내 사랑의 세상을 따뜻하고 다정하게 만들고 싶다. 모든 세상이 다정하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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