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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배 Zoe Aug 31. 2023

나는 쾌락주의자, 에피큐리언입니다

22-12-26

오늘은 늦잠 아닌 늦잠을 잤다. 어제 오랜만에 12시 가까운 시간에 잤더니 8시까지 잤다. 잠에서 깬 것도 내 의지가 아닌 전화 때문이었다. 소피의 연락을 받았다. 오늘 놀러 오라는 초대 전화였다.


소피는 적당함을 정말 잘 안다. 소피는 살아온 평생 일 하느라 바빴던 덕에 음식 솜씨가 뛰어나진 않다고 스스로를 낮추곤 했다. 할 수 있는 음식 가짓수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소피의 식사는 한결같았다. 호주에서 제일 맛있는 COS 상추를 넣고, 고소한 계란 두세 개, 고추장과 진한 들기름을 넣은 참치 비빔밥. 그것을 몇 날 며칠이고 먹어도 매일 기쁨으로 가득 찬 식사를 한다. 손님들을 대접할 때도 타피오카전분치킨 같은 한 방이 있는 요리들이 한 두 개 있었을 뿐, 거의 겉치레에 신경 쓰지 않는 음식을 한다고 한다.



나는 이렇게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돼서 집밥 같은 비빔국수와 망고를 먹었다. 풍성한 즐거움을 누렸고 뒤늦은 크리스마스의 축복을 나눴다. 오늘 일기의 제목은 '소박함에 행복하기'이다. 소피는 나랑 정말 닮은 데가 많다. 그러니 우리는 40년에 가까운 나이차를 극복하고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소피는 예순과 칠순 사이 어느 즈음에 있다. 그런데 그 옹골참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른다. 소피가 말하기를 그 단단함은 모두 소식에 있다고 한다. 물론 평생, 매일 식단이 소식은 아니다. 소피는 패스트푸드의 맛있음을 분명 안다. 중국 요리의 근사함 또한 안다. 라면의 얼큰한 냄새에 끌린다. 하지만 배불리 먹은 날에는 저녁을 먹지 않거나 다음날 식사를 줄인다. 분명히 그렇게 한다.


소피는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건강하게 사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호주에 오기 전 나는 아주 규칙적인 생활을 했었고, 잘 잤고, 운동도 꾸준히 했다. 그런데 어딘가 아팠다. 자꾸 잔병치레를 했다. 이유가 뭘까 하고 이것저것 자료들을 뒤져봤다. 그러다 먹는 것에 해답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얼핏 했다.


소피를 보고 알았다. 유레카! 정말 맞았다. 나는 먹는 것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라면만 먹고 살아가는 할머니도 있지 않던가? 특정인들에겐 음식이 별 영향을 주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소화기관이 안 좋은 편이다. 그래서 밥을 먹으면 항상 더부룩했다. 보통 고기를 먹으면 뭔가 더 안 좋았다. 많이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때는 뭐가 잘못된 줄도 모르고 그냥 먹었다. 먹고 나서 그 더부룩함을 종일 감수해야만 했다.


필요한 영양을 구분하지 못하고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과함을 추구한 덕이었다. 비단 식사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나의 작은 필요조건이 뭔지 알아내는 중이다. 나는 소피에게 여전히 배울 게 많다. 겉치레에 집중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 아직 어렵다. 우선 화려하고 좋은 것을 보면 마음이 동했다가 마음을 가까스로 다잡고 수수하게 행동한다.


 




고대 그리스에는 쾌락의 정원을 운영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에피쿠로스. 이 에피쿠로스의 추종자를 에피큐리언이라 부른다. 그 뜻은 향락주의자에 가깝다. 나는 그를 추종하는 쾌락주의자, 향락주의자, 에피큐리언이다.


기원전 아테네 교외, 바깥세상에서 볼 수 없는 한 정원에서 에피쿠로스와 에피큐리언들은 쾌락을 좇았다. 세상 바깥으로는 소문이 무성히 나돌았다. 매춘부들을 애인으로 삼았다던가, 너무 먹어대는 바람에 하루에 두 번씩 토했다던가와 같은. 그렇지만 정원 안에는 소문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쾌락이 존재했다.


이 쾌락은 흔히 생각하는 무절제하고 자극적인 쾌락이 아니다. 정원 속 쾌락이란 빵과 물 그리고 약간의 포도주 같은 것들이었다. 에피쿠로스에게 쾌락은 고통의 부재였다. 무소유 그리고 평정으로서 쾌락을 추구하며 마음의 평화를 좇는 것이 바로 쾌락이었다.


실제로 에피쿠로스의 정원에 매춘부들이 드나들었을지도 모른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인간애를 바탕으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따듯함을 나누었으니까. 수용하고 함께하면서 행복하고 평화로웠다.


에피큐리언들은 간소한 삶을 살았지만 그렇다고 정말 빵과 물만 먹으며 평생을 보내진 않았다. 간간히 호사스러운 파티를 즐길 줄도 알았다. 절대적으로 금욕적인 삶이라기보다 필요하지 않은 욕심을 내려놓았고, 간간히 사치의 즐거움을 누리며, 어디선가 주어지는 좋은 것들을 종류와 상관없이 전부 환영하며 기뻐했다. 많은 것을 비울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 어쩌면 심플해질수록 행복을 탐지하는 감도가 높아진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자라 불리지만 나는 그를 감사의 철학자로 생각한다. 에피쿠로스가 좇는 평화의 쾌락은 내게 감사로서 찾아왔다. 아주 작은 것에서 오는 기쁨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앞으로 펼쳐질 삶 앞에서 잊지 않고 견지할 단 하나의 태도를 남긴다면 나는 이걸 말하고 싶다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고 평화로울 것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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