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만 보이는 마법
나이를 꽤 먹은 후에야 가슴 뛰는 첫사랑을 경험한 나는, 사랑에 관해서 만큼은 누구보다 깊은 연구과정과 체험수기들을 소유하고 있다. 1년 12달 365일 동안 글을 쓰지 않는 날이 드물기 때문이다. 첫사랑은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아낸 후에 만난 쉽지 않은 감정이었기에 오롯이 집중했었고 그로 인해 일상이 온통 고백으로만 채워졌던 나날들이었다. 그때 나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그로 인해 순간순간마다 놀라고 감탄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 중에 첫 데이트가 있다. 생전 처음이었던 봄날의 꽃놀이. ‘우리도 꽃놀이 가자’는 그의 한 마디에 지금 같아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분홍분홍한 옷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길에 나가 3보 이상 걸으면 무조건 승차인 내가 지하철을 타고 여의도 한복판에 내렸을 때는 마치 독립운동이라도 시작한 것처럼 으쓱하기까지 했다. 벚꽃이 한창이던 여의나루역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까만콩을 가득 담은 시루처럼 빼곡한 사람들 머리통이 지하철역에서 밀물처럼 밀려올라와 썰물처럼 꽃길로 흩어지기를 서너 번, 코앞으로 다가온 약속시간에 맞춰 지하도 입구에 섰을 때 저 멀리 보이던 작은 머리통 하나.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을 기억할 때마다 깊은 한숨을 내쉰다. 누가 누구인지 분간 안 되는 그림이 분명했는데, 그 속에서 그를 찾는 일 같은 건 감히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는데, 단 한 번에 나는 그의 머리통을 찾아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머리통이 얼굴을 보이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마법은 그런 것이다. 일순간 그와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멈추거나, 사라지거나, 보이지 않게 되는 것. 그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와 내 손을 잡고 ‘가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봤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것들은 내 기억 속에서 무안하리만치 깔끔하게 사라졌다.
2021년 11월12일, 옷소매 붉은 끝동을 보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준호는 언제 나오는 거냐며 투덜거리다 어쩐 일로 드라마를 다 보고 있느냐는 어머니의 질문을 받고 봇물 터진 듯 이준호에 관해 알고 있는 것들을 떠들어댔다. 처음엔 심드렁한 표정이던 어머니가 점점 희한한 구경거리를 보는 표정이 되시더니.
“그러니까 저기 세자가 이준호라고?”
“아니, 저 세자는 아역이고, 성인역이...”
“어른인데?”
“어?”
화면에 이준호가 나왔는데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고 있다.
이곳에 쓸 수 없는 말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다음날, 다시 텔레비전 앞에 앉는 나를 보고 어머니께서 놀라셨다.
“또 보게?”
“네”
“나, 그 송혜교 나오는 드라마 볼 건데?”
“...”
“니 이모가 재밌다고 그거 보라더라고”
“...”
“그냥 너 보고 싶은 거 봐. 난 재방송 보면 되지 뭐”
불가침에 가까웠던 어머니의 채널선택권을 강탈한 나는 그날 밤 꿈에 이준호를 만났다.
꿈속의 이준호는 세자 저하였고 나는 궁궐 담에서 궐 안의 세자를 훔쳐보는 늙은 아낙이었다.
세자 저하는 하루 종일 책을 읽고 또 읽고 책만 읽고 있었고 그걸 나는 또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침으로 얼룩진 베게가 사뭇 망신스러워 후다닥 커버를 벗겨 세탁기에 넣으면서 중얼거렸다.
‘나처럼 책을 좋아하나봐.’
본.방.사.수.
세상에 이보다 비장한 단어는 없다. 없어야 한다. 첫 사랑 이후, 다시 처음으로. 사실 두 번째지만 일면식도 없는 그 누군가라는 점에서는 처음이다. 한 사람만 눈에 보이는 시간이, 다시, 내게, 찾아왔다.
마법의 시간이다.
이준호가 있어 겨울은 겨울이 아니게 되었다. 나는 추운 것을 몰랐고 눈도 기다리지 않았으며 겨울을 알게 하는 그 모든 것들과 멀어진 채 텔레비전과 노트북, 스마트폰만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보고 또 보고’를 드라마가 아닌 진짜 문장으로 몸에 익히게 되었다. ‘하루 종일 니 생각 뿐이야’도 노래가 아닌 진짜 문장으로 몸이 알게 되었다.
나는 사랑에 빠졌다. 대책도, 방책도 없는데다 주책까지 없는 짝.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