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파사나(Vipassana) 불교의 연말연시(年末年始) 모습
치앙마이 '위앙 파파오 사원'에서
불교의 전통에
어디 규칙과 제약이 있는가?
구름이 일어나고 스러지는 것처럼
서로의 인연에 따라 만나고 흩어지는 것인데,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슬퍼하겠는가?
"불교란 무엇인가? "
석가모니(어진 성자)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하여 그 연향(蓮香)이 아시아 대륙으로 뻗어 나간 종교이다. 그리고 수천 년 아시아 민중의 가슴 속에 행복과 평안을 안겨다 준 신앙이다.
우리 민족에게도 고려 시대에 불교가 있었고, 조선 시대에는 유교가 국가이념이었던 것처럼, 지금도 불교를 국교로 삼는 나라들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500여 년 동안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탄압을 받았지만, 지금도 굳건하게 그 위상을 지키고 있다.
타일랜드와 미얀마는 우리의 고려 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국교가 불교이며, 위파사나의 전통이 가장 잘 지켜지고 있는 나라들이다. 불교에는 두 개의 주류가 있다.
중국에서 한국, 일본으로 건너간 대승불교(수레바퀴, 법륜)권이 있고 미얀마아와 타일랜드, 라오스, 스리랑카 등으로 넘어간 소승불교권이 있다. 사찰에서는 주로 명상 수행을 하는데, 소승불교(원시불교, 상좌부불교, 테라와다 Theravada)에서는 ‘위파사나 수행’을 하고, 대승불교권(마하야나 Mahayana)인 한국의 조계종에서는 ‘간화선 수행’을 한다. 여기에서 ‘대승’이라는 말이 ‘더 위대하다’는 말이 아니므로 오해 없길 바란다.
이들에게 불교는 단순한 종교의 차원을 넘어, 자신의 세계관을 정립해주는 하나의 보루이다. 국민들의 가치관과 모든 생활 양식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어느 곳을 가나 대부분 마을 한가운데 사원이 있으며, 그 수는 3만 5천여 개에 이른다.
국민들은 그 도도한 불교의 틀 속에서의 자신의 종교철학을 실천하며, 소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태국 북쪽에는 대부분 국경에서 무작정 넘어온 미얀마 소수민족들이 많이 산다. 그들이 순수한 불심을 대할 때면 마치 솔바람이 이마에 불어오듯, 마음이 저절로 정화되어 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있으면 금새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자연 속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은 그 표정부터가 다르다.
콘크리트와 자동차의 굉음, 전자기기의 홍수, 온통 양이온에 둘러싸인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소음은 온종일 사람들을 짜증 나게 하며, 저녁이면 더욱 술 생각이 나게 만든다. 우리의 50년대부터 2020년의 문명이 존재하지만, 자연에 둘러싸여 사는 그들의 모습은 도시인들과는 많이 다르다. 마치 옛날 우리네 시골로 돌아와 있는 듯하다. 그래서 자꾸 가고 싶다. 그 풍경에 안겨, 한 몇 년 푹 살고 싶은 마을이다.
위파사나 멍크(Monk 스님) 친구가 있어 10일 동안 위앙 파파오(Wiang Pa Pao)에 있는 사원에서 ‘동안거(冬安居)’ 집중수행에 나섰다. 멍크는 한국에 근로자로 온 적이 있다. 30대 후반인 그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둘이 있었는데, 아마도 살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남들도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 ‘집 사고 결혼하고, 가게 차리고 차를 사는 것을 보고’ 부푼 꿈을 안고 왔다. 꼬박 3년을 일하고 집에 가보니, 아내가 없었다.
다행히 집은 하나 사서 지금 부모님이 살고 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방황은 또 얼마나 했을까. 한없이 마음이 여리고 착한 멍크이다. 항상 웃기를 잘하지만 그의 이런 방황은 그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버리지 못하면 한없이 자신만 더 괴로워지니까?
”바람이 불면 일어나, 길을 가야만 한다.
주저앉아 있으면
그는 영원히 떠나지 못할 것이다.”
위파사나 사원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10일이나 21일짜리 명상 수행을 진행하는데, 국적에 상관없이 아주 쾌적한 환경 속에서 숙식를 무료로 제공한다. 단지 참가자들은 수행만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다.
위파사나 수행은 두 갈래의 전통이 있으며 주로 인도의 '고엔카'와 미얀마의 '마하시' 전통의 수행이 있다.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충청도 근방에 위파사나 수행처가 유일하게 있었으며, 참여해 본 적이 있다. 수행 이외에 특히 감명 깊었던 것은 ‘환경파괴 0’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모든 세제는 물론, 심지어 치약까지 쓰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찰은 아무리 깊은 산속을 들어가도 부엌이나 욕실에 세제가 넘쳐나는데, 스님들에게 과연 산 속에 살 자격이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소승불교 권의 나라에서는 누구나 일생에 한 번 이상은 출가를 한다. 그것은 가문과 마을의 영광이어서 마을 사람들이 잔치까지 해준다. 심지어 왕의 나라인 이곳에서는 왕족들도 마찬가지다.
세계에서 가장 장수했던 왕인 푸미폰 아둔야뎃 9대 국왕은 짜끄리 왕조의 라마 9세이며 70년 동안 재위했지만 인자한 왕으로 국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특히나 미얀마에서 넘어온 고산족들은 치앙마이 북부 일대에 많이 살았는데, 그들은 골드트라이앵글을 따라 마약을 재배하며 세계적인 마약왕 쿤사의 그늘에서 살고 있었다. 왕은 그것을 불쌍히 여겨 이 일대에 차와 커피를 제공하여 지금은 대부분 1,000고지가 훨씬 넘은 고산지대에, 거대한 차밭을 일구며 살게 했다. 그들에게는 마치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현재는 푸미폰 왕의 아들인 와치라롱껀이 재위하고 있으며, 지금도 왕은 지존(至尊)으로 모셔져, 마을 입구에나 부처님 옆에 사진이 놓여있다. 그렇지만 왕도 일단 출가를 하게 되면 아래 자리에서 계를 받으며, 어린 아이처럼 스님 앞에 공손하게 무릅을 끓고 있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위파사나 전통은 출가와 탈속도 비교적 자유롭다. 남자들은 일생에 7번까지 출가할 수 있으니 불가에 대한 좋은 경험이 된다. 그만큼 스님들에 대한 존경과 이해도를 넓힐 듯하며, 환속 후에도 스님에 대해 친근감이 더 느껴질 듯하다.
출가 후 단 한 번의 파계로 다시는 절로 돌아갈 수 없는 한국의 대승불교의 전통과는 다르다. 결혼이 가능한 태고종과 천태종이나 대처승들도 보지 못했다. 또한 소승불교는 ‘출가와 여인 성불’이 없었으나, 지금은 하얀 옷을 입은 ‘메시’로 출가를 한다.
“어디로 가십니까?
무얼 찾아 가십니까?“
이곳도 하안거가 동안거가 있어, 겨울이 다가오면 한국의 사찰처럼 동안거를 나선다. 그러나 한국과 다르게 자기가 잘 수 있는 준비를 하고 떠나야 한다. 그래서 멍크들의 등에는 항상 텐트와 다른 짐들이 있다.
그리고 10일씩 인연이 닿은 사찰을 찾아가며, 산 속에 텐트를 치고 집중 수행을 하며 법거래를 한다. 그리고 아침이면 큰스님에게 수행점검을 받는다. 위파사나의 전통은 한국의 조계종과는 많이 다르므로, 그들의 전통을 이해해야 오해의 소지가 없다.
하긴 불교의 전통에
어디 규칙과 제약이 있는가?
구름이 일어나고 스러지는 것처럼
서로의 인연에 따라 만나고 흩어지는 것인데,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슬퍼하겠는가?
비교적 초기 불교의 전통을 많이 따르고 있으며, 그들의 땅과 풍습에서 자란 그들만의 양식으로 이해해야지, 우리의 잣대를 너무 들이대면 곤란할 것이다. 멍크Monk들은 고기도 먹는다.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에도 그러했으며,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상황이였을 것이다. 고난의 수행자들은 오직 탁발에 의지해서 공양을 했을 것이다.
가난한 백성들이 첫 새벽 가장 소중하고 깨끗한 음식으로 공양을 준비하는데, 어디 스님들이 찬 밥 더운 밥 가릴 수 있었겠는가. 찢어지는 살림살이에 준비한 소중한 양식들을 입에 넣으면, 그저 진한 감동과 함께 안쓰럽고 고맙기만 했을 것 같다.
처처處處가 불상佛像이고,
사사事事가 불공佛供이다.
생각나는 옛이야기 이야기 한 구절이 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산 속을 헤쳐나온 길손은 금방 얼어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가슴까지 눈이 쌓인 산속, 스님도 어디에서 쉽게 나무를 구할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한 스님은 법당에 있는 목불(木佛)을 쪼개 불을 때서 길손의 몸을 데워주고, 뜨거운 물도 먹여 그를 살렸다.
아마도 그 목불 속에서는 사리는 나오지 않았을까? 말 그대로 등신불 같다.
"부처는 마른 똥막대기다." 라고 일갈한 어느 큰 스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다시 한 번 읇조려 진다.
곳곳에 하느님이 상주하시며,
일마다 예배를 드리듯이 해라
지금도 미얀마와 타일랜드, 라오스 등에는 탁발의 전통이 살아있으며, 미얀마에 가장 잘 남아 있는 듯하다. 특히나 미얀마는 지금도 매일 아침이면 노스님에서 동자승까지, 맨발로 탁발에 나선다. 흙바닥에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부터 앞선다.
국민들도 아예 첫 새벽에 지은 밥과 과일, 과자, 심지어 돈까지 미리 준비해 둔다. 그리고 문 앞에 인기척이라도 나며, 신발을 벗은 채 달려나가 그 앞에 무릎을 끓고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인다. 아낙들은 수시로 묵주를 돌리며 경을 외운다.
‘신심 즉 생활이다.”
저절로 우러나오는 그 동작에는 경건함이 묻어나며, 이것은 남녀노소 구분이 없다.
수행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대부분 전날 절로 모인다. 이 나라는 대부분 집집마다 오토바이가 있다. 그야말로 대부분의 교통수단이다. 버스들도 별로 없고 ‘쏭태우’라고 이름 붙인 트럭 뒤에, 나무 의자를 놓고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2010년이 지나고서도 버스에서는 차장이 돈을 받은 그런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타일랜드에서는 여행 내내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다녔다. 오래된 오토바이였지만 나는 운 좋게 하루에 50밧(2,000원)에 빌렸다. 아마 요즘 신형 오토바이를 빌리며, 최소한 200~300밧은 갈 듯하다.
나는 멍크를 뒤에 태우고 밤중에 어느 마을을 지나다,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고 있어 잠깐 들어가니, 상갓집이었다. 아무리 일 년 내내 여름인 나라지만, 산속 년 말의 날씨는 추웠다.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마실 나온 ‘엠’이라는 젊은 아낙이 시간이 너무 늦었다고 자고 가라고 한다.
사실 시간도 좀 늦기도 했다. 모든 존경의 대상인 멍크가 이 쌀쌀한 밤길을 이방인과 낡은 오토바이에 의지해 가고 있으니, 안타깝기도 했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