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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코포니 Mar 18. 2020

정화(貞和)

1집 和

 여느 때처럼 죽고 싶었다. 병원을 향하는 발걸음은 일상이 되어버려 이제 어떠한 감정도 풍기지 않았다. 의사가 자신의 방으로 나를 따로 불렀다. 의사는 머뭇거리더니 엄마에게 더 이상 쓸 수 있는 약이 없다 했다. 길어도 3개월 정도 남았다고 했다.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눈물로 뒤덮인 나를 두고 의사는 나갔다.


엄마는 죽는다.

아니 의사의 말은 마치 '죽어야만 한다.' 같았다.


 의사의 선고 앞에서 삶을 선택할 수도 없어진 엄마는 진정으로 무력했다. 그런 엄마 앞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은 사치였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죽는다는 갑작스러운 인식은 나의 일상적이던 부정을 잠재웠다. 엄마는 나를 살게 했다. 2017년 12월이었다.


 엄마가 좋은 사람이었느냐, 엄마와 좋은 관계였느냐라는 말에 고개를 쉬이 끄덕이지는 못하겠다. 엄마는 사회가 일반적인 '엄마'에게 요구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엄마는 옳은 방식은 아닐 수 있지만 누구보다도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왔다. 그렇게까지 악착같이 산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렇게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에 도전하는 뚜렷한 눈을 난 아직까지도 본 적이 없다.


 엄마는 의사의 선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회복하고 있다고 믿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먹은 것을 다 토해도, 팔이 점점 부어올라도, 그 뚜렷한 눈은 사라지지 않았다. 삶에 대한 확신을 문신으로 새겨놓은 듯했다. 종종 같은 병실을 쓰는 옆 침대의 아줌마에게 "나 괜찮아지고 있는 것 같아. 곧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엄마는 2017년의 마지막 날 무리해서 집으로 잠시 외출했다. 거실의 텔레비전 앞으로 가족들이 모두 모여 연예대상을 보며  카운트다운과 '해피 뉴 이어'를 외치는 아주 지루한 풍경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았지만 모두 조용히 삼켰다. 2018년이 되자마자 엄마는 원래 있어야 하는 듯이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상황은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나빠졌다. 서서히 혼자 걸을 수 없었고, 서서히 일어서지도 못했고, 서서히 음식을 소화시키지도 못했다. 나도 고시공부를 놓아야 했고 병원에서 생활했다. 내 키만큼 쌓인 공부해야 할 책 보다 한 숨이 더 무거워졌다.


 사실 엄마는 진통제로 대부분의 시간에 잠들어 있었다. 그래도 가끔 엄마가 깨어있을 때면 대화를 했다. 생전에 엄마와 딸로 많은 대화를 한 적이 없어 둘 다 서툴렀지만. 대부분은 병원밥이라든가, 옆 병실 환자라든가, 마트에서 산 물건이라든가 영양가 없는 주제였다.


그래도

어떤 날에 엄마는 내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내가 엄마를 닮아서.

어떤 날에 엄마는 모든 게 후회된다고 말했다.

어떤 날에 엄마는 그제야 나에게 사랑한다고 연거푸 말했다.


 엄마는 예술가로 태어난 사람이었다. 시를 좋아하고, 산울림을 즐겨 듣고 그림을 잘 그렸으며 무엇보다도 손재주가 탁월했다. 한 번의 눈흘김으로 모든 뜨개질을 따라 할 수 있었고, 바느질로 뭐든 만들 수 있었다. 가방이며, 이불이며, 옷이며 엄마의 작품이 아닌 것이 없다. 동네에서 엄마를 모르는 아줌마가 없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엄마같이 똑똑하고 재주 많은 사람은 없다며 앞다투어 칭찬했다.


 하지만 엄마는 예술가로 살아가지 않았다. 엄마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오빠의 말에, 천연덕스럽게 그럼 자신은 간호사가 되야겠다 생각했고, 정말 간호사가 되었다고 한다. 수년간 엄마는 소아아동병원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태어나는 것을 도왔다. 그러다 엄마는 돈에 물들었다. 간호사도 그만두었고, 이 사업, 저 사업에 손을 댔고, 많은 돈을 빌리고 빌려주었다. 다 잘 안됐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등을 졌다. 웃기게도 곧을 정(貞)에 화목할 화(和)를 쓰는 엄마의 이름과는 정반대로 살았다. 왜 그렇게 돈을 벌려고 했는지 물어보면, 엄마는 아이처럼 해맑게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머리카락도 다 빠져버려서 겉모습도 아이 같았다. 


 엄마의 삶이란 건 원래 딸은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다. 엄마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보면 운이 좋은 건지, 엄마의 죽음을 기다리던 도중 엄마의 삶을 객관적으로 마주했다. 나는 그리고 그 길이만 다르지 엄마의 삶과 내 삶이 정확히 겹쳐있음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내 안에 곤히 자고 있던 아이가 눈을 떴다. '너는 음악가가 될 거야.' 나의 최초의 기억부터 간직하고 있었던 말. 아무런 근거 없이도 어린 시절의 나는 음악 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나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며 나는 이 믿음을 조심 스래 잠재웠고, 사회가 요구한 대로 살아가기로 선택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성향을 완전히 무시한 채로 살아가다 중요한 것들을 놓쳐버린 사람이 나의 눈 앞에 있었다. 그 사람의 죽음은 거부할 수 없는 곧이었고, 나는 이 죽음의 목격자로서 그 실수를 반복할 수 없었다.


이 고약한 운명을 바꾸겠노라.


"나 음악을 하려고. "


 엄마는 알겠다고 했다. 사실 고시 공부를 하던 딸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면 화를 내야 정상이겠지만, 엄마는 별다른 미동도 없이 내가 깎아준 사과를 먹으며 알겠다고 했다. 2018년 2월이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조금 막막했다. 악기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데 어떻게 음악을 만들 수 있을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전자음악을 선택했다. 컴퓨터로 한다면 음악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엄마의 상황 때문에 자주 빠져야 했지만 병원 근처에서 일주일에 한 번 1시간의 레슨을 꾸역꾸역 받기 시작했다. 장비는 인강을 듣던 노트북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엄마한테 나의 음악을 들려주고 싶었다.


  노란 2018년 4월 16일,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폐를 채운 암덩이는 말 그대로 엄마의 숨을 끊었다. 삼일장이 끝나고 상당한 감정을 부여 쥐고 집에 돌아왔다. 40만 원으로 싸구려 중고 오디오 인터페이스와 스피커를 주문했다.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계속 음악을 만들었다. 하루에 몇 곡씩 울컥울컥 게웠다. 혼절할 것 같은 와중에 앨범을 내야겠다고 우습게도 생각했다.


 앨범의 이름은 엄마의 이름 정화(貞和)에서 마지막  '' 가져와야겠다고 중얼거렸다.


 엄마의 눈빛이 아른거린다.


 

 


 <카코포니는 어떻게 음악을 만들까>

매주 수요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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