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던 때
앞만 보고 내달리던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잠시 쉬기로 했다. 자율신경계가 망가져서 강제로 쉬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난 쉬는 걸 내 의지로 선택하는 듯한 태도를 장착하고 있었다. 건강은 관리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반 년 정도 푹 쉬면 괜찮아질 거라는 희망에 차 있었다. 이 시간을 잘 쉬고 건강을 회복해서 인생의 다음 챕터로 나아가겠다고만 기대했다. 그렇게 앞날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있으니 걷지 못하고 누워만 지내던 날들도 마음이 괴롭지는 않았다.
발병 초기에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책 읽기였다. 몸과 맘이 피로하고 어지럼증으로 뭘 제대로 못하니 생활은 절로 단순해졌다. 책으로 지루함을 달래고 그러다가 생각나는 것들이 있으면 메모하거나 글을 쓰는 게 내 일상이 되었다. 덕분에 있던 책, 새로 산 책, 매거진 등 읽을 것들이 침대 옆에 쌓였고 느린 독서 속도에도 불구하고 완독 하는 책이 늘어갔다.
자연스레 혹은 어쩔 수 없이 디지털을 멀리하게 되면서 느끼는 것은 고요와 평안이었다. 조용하고 정적인 것, 느린 것에서 오는 편안함. 간혹 심심하기도 했지만 자극적이지 않은 그 생활이 꽤 만족스러웠다. 최신 트렌드,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 알아야만 한다고 말하는 각종 광고와 기사, 알고 싶지 않은 남의 이야기 속에 허우적대고 비교하며 바쁘게 지내던 이전과는 달랐다. 인터넷과 디지털-미디어-디자인 세계의 변화를 누구보다 빠르게 인지해야 했고 그 시류에 합승해야 했던 얼마 안 된 지난날을 생각하면 어찌 그렇게 살았나 싶을 정도였다. 조용한 생활을 지속하면서 비로소 빠르기가 기본인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가만히 세상을 관조하니 쏟아지고 휘발되는 것, 소비되고 버려지는 것 그 이면의 공허함에 집중이 됐다. 언제는 뒤처지는 것에 조바심이 들었는데 이제는 뒤처짐을 자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빠르게 앞을 개척하며 나갈 텐데 그럼 다른 누군가는 천천히 뒤를 봐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가장 끝에서, 시류에 휩쓸려가지 않고서.
휘황찬란하고 번쩍번쩍하고 눈을 사로잡는 것들, 금방 스러져가는 순간들 대신에 담백하고 편안하고 언제나 거기 있는 든든함을 키워가고 싶어졌다. 디지털과 미디어와 디자인 세계 아래 있는 사람으로서 거기서 오는 영향을 피할 도리는 없지만 같은 세계도 조금은 다른 방식과 방법으로 표현하며 살아낼 수 있을 거라고. 느리지만 뒤에서 뭔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한 시기를 겪고 난 다음의 나는 기대했다.
내겐 희망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