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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혜빈 Jun 21. 2023

열매

2023 첫 작품의 과정

1 / 기회 (3월 말)

올 중반기까지도 전시 활동은 묘연할 거라 생각했다. 작품 수도 별로 없고 언제 다시 작업을 시작하게 될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6개월의 시간 끝에, 드디어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해나갈지 결심이 섰고 감사하게도 기회가 생겼다. 올여름 부산에서 진행하는 호텔아트페어에 나가게 된 것이다. 어쩜, 본격적으로 작업에 착수하게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길이 열리는 건지! 하나님의 이끄심은 놀라울 뿐이라고 감탄했다.


내겐 정식 참여 서류 접수 때까지 약 두 달의 시간이 있었다. 아직 완성된 신작은 없었지만 작품이 많지 않아도, 크지 않아도 됐기에 부담이 없었다. 그동안 부지런히 구상하고 실험하고 제작해서 올 첫 열매를 맺자고 생각했다.








2 / 첫 한 달 (4월)

내 작업 방식은 대체로 아이디어를 내고, 작은 샘플들로 결과를 계산하고, 보이지 않는 나머지를 예측하고 상상하는 걸로 진행된다. 그리고 될 것 같은 확신이 들면 본격적인 제작에 착수한다. 오랜 시간 머릿속으로만 그림을 그린 후에 실제 작업에 들어가는 건 내가 에너지(체력과 비용)를 가장 아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조금 답답할 때가 있긴 해도 꽤 재밌다. 무엇보다 이런 방법이 훈련이 되는 것 같아서 좋기도 하고 말이다.


여하튼 호텔아트페어에 참여하기로 한 후 첫 한 달 동안 쭉 실험하고 구체적으로 상상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체력을 쓰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하루가 다 간다는 말이 뭔지 체감하며 지냈다. 그러고 나니 어느 순간 다음 단계로 가야 한다는 감이 왔다. 바로 제작. 솔직히 될 것 같은 확신에 제작을 하는 게 아니라 예측과 상상만으로는 부족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긴 했지만.


이런 때 제일 걱정되고 떨리곤 한다. 실패할 걸 아는데도 뛰어드는 심정과 다르면서도 비슷한 그런 느낌이랄까. 일단 해봐야지만 알 때. 그런데 생각한 대로 나오지 않을 때의 실망감과 실패도 품을 각오로 나아가야 하는 때인 것이다. 에너지가 없는 만큼 타격감도 커서 항상 이런 과정을 앞두고 마음먹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결과도 없다는 걸 아니까. 또 잘 되지 않더라도 긴 과정 중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건 사실이니까. 나아간 만큼 다음에 대한 힌트도 얻을 수 있으리란 믿음으로 진행해야 하는 때였다.









3 / 마지막 한 달 (5월)

몇 주를 걸려 작품 재료를 주문하고, 도착한 재료로 이제까지 머릿속으로만 그려왔던 걸 실제로 실험하고, 전시될 것을 염두하며 제작했다. 중간엔 힘이 들어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가 되기도 했지만 애를 쓰며 그렇게 남은 한 달의 시간을 채웠다.


그런데 왜인지 작업을 할수록 자신감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작품 완성을 앞두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이름 모를 잣대를 들이대는 나쁜 습성이 작용한 것이다. 정답이 없는 데서 정답을 찾길 바라기 시작했다. 너무 자유로워서 오는 두려움인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가능한 상태, 즉 자유롭고 또 자유롭다는 건 어찌 보면 감당하기 무겁고 어려운 상태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들과 힘겨루기를 하다가 이메일 함에서 졸업작품을 하던 시절 교수님과 주고받은 이메일을 살펴보게 됐다. 거기서 발견한,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나서 교수님이 내게 주신 답장.



어떻게 이렇게 졸업하고 나서도 교수님께 힘을 받게 되는지. 그때의 배움은 지금도 나를 이끌고 있었다.








4 / 완성하고 나서 (5월 말)

작품 접수를 완료했다. 설정한 디데이에 맞춰 겨우 접수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여유를 남기고서 말이다. 큰 산 하나 넘었다는 안도감이 차오르니 그간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시간을 돌아보게 됐다. 참, 그리 크지도 않은 이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정말로 많은 시간이 걸렸구나 싶었다. 지난 두 달의 시간뿐만이 아니었다. 헤아려 보면 작년 9월 말 마지막 전시 활동이 끝난 후 약 8개월 만의 신작이었다. 2023년 첫 작품은 이렇게 두 번째 계절도 끝나갈 즈음에야 완성하게 된 것이다.


작품세계를 제대로 알아가겠다고 작업을 그만둔 초기엔 조금 두렵기도 했다. 솔직히 작업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예상과 다르게 너무 이르게 들었으니까. 그렇지 않으리란 걸 알지만 내 안에서 꺼낼 말이 벌써 끝나버린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있었다. 그 불안을 잠재우며 나름 긴 시간을 쉬는 동안 많은 고민을 해왔더랬다. 그러다 마침내 어느 봄날엔 고민의 답을 얻고 기뻐하기도 했고, 또 시간이 흘러 본격적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중에는 갖고 있던 기쁨과 용기를 기억 못 한 채 자신감을 잃기도 했다. 정말 수많은 오르내림과 흔들림을 겪으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인지 새로이 작품을 완성했다는 사실이 다른 어떤 때보다도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작품의 완성보다도 놀라운 건 그동안 설명되지 않았던 나의 선택이 이해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작품의 완성과 함께 비로소 왜 이 이름을 선택했는지, 왜 이런 작품을 만들고 있는지, 앞으로 왜 그런 작품을 만들 것인지, 왜, 왜, 왜라는 질문에 드디어 내 마음을 꿰뚫는 시원한 답은 할 수 있게 되었다. 작품을 완성하기 전에는 전체 그림에서 조각 몇 개가 빠진듯한 느낌이었다. 작품이 나온 이유를 설명하라면 설명할 수는 있겠는데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은, 뭔가 분명하지 않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작품을 완결 짓고 나니까 비어있던 조각을 찾아 제대로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처음부터 다 알고 시작하는 작품도 있다면 이렇게 퍼즐을 맞추듯 과정 중에 혹은 완성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작품도 있는 것 같다. 아, 이제야 이렇게 시원하게 내 지난 시간과 선택이 이해되다니. 지금이니까 알게 되는 것, 여기에 다다라야만 보이는 경치라고 생각하기에 내가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이 지점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못내 흐뭇하기만 했다.


바야흐로 한 작품. 앞으로 기존 시리즈를 어떻게 이어갈지, 신작 시리즈는 어떻게 연구하고 선보일지 가야 할 길은 멀고 어렴풋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쁠까. 왜 이렇게 기대가 될까. 어렴풋한데도 나는 선명하고 뚜렷한 즐거움과 기쁨 가운데 서있었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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