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표현
과거 수많은 예술가들을 통해 느끼는 바는 작품 세계를 쌓아가는 자체가 철학을 하는 것과 닮았다는 사실이다. 예술가는, 특히 미술 분야는 그 철학을 시각적으로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이라는 말이 어렵다면 삶을 통트는 생각 혹은 이론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빨리 개인전을 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전을 급하게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내 생각을 완벽하게 말할 수 없는데 무엇을 보여줄 텐가. 학부 8학기를 다 마치고서 졸업 전시를 통해 그간 배우고 익힌 것을 나의 것으로 선보이듯 개인전 또한 그래야 하는 것 같다. 오래 고민하고 실험하고 공부하고 쌓아서 완성된 최선이자 최고의 것을 선보여야 하는 것이다. 작품을 빨리, 많이 하는 것도 필요하고 도움이 될 때가 있지만 그것이 다가 아님을 느낀다. 깊은 통찰은 시간 속에 녹아나고 이루어지니까.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되어서도 작품 하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이제 막 미술 작가의 길에 들어선 내게 중요한 건 ‘사유’라는 걸 알게 되는 요즘이다. 이전에 6개월간의 작업 공백 끝에 내가 작품에서 추구하는 목표를 발견하고 깨달았을 때, 앞으로 그것들을 어떻게 표현하는가가 나의 과제가 되었다고 글을 썼었다. (마침내 찾은 답) 그것은 작품의 내용적인 측면을 형식으로 어떻게 옮기는가의 문제였고 무엇보다 작가 개인적인 표현의 문제였다.
이번에 새롭게 마주한 문제는 개인을 넘어선 것이다. 시간과 역사의 거대한 흐름 안에서 내 작품의 형식과 내용이 어떤 의의가 있으며 어떤 유의미한 발언으로 남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된 것이다. 미시적으로 보면 내 작품은 나의 개인적인 표현일 뿐이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내 작품 역시 역사 안에 속해 있다. 이름 없는 무수히 많은 작품들 중에 하나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름이 없다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단 한 작품일 뿐이라도 그저 스러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 수 세기가 지나고 나서도 의미 있는 작품으로 존재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 작품은 더 깊은 사유 없이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미술사를 살펴보면 나올 것은 이미 모두 다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미술 세계 안에서, 그럼에도 나는 나만의 작품을 하겠다고 서 있다. 어떻게 이 세계 속에 설명 가능한 하나의 이론을 만들 수 있을까. 어쩌면 거창한 꿈일 수도 있다. 그래도 조금씩 더듬어 배워나가고 또 쌓고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며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이제 막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작가의 일이 아닐까. 당장 완성을 바라기는 한참 이르지만, 이 모든 과정을 지나다 보면 나만의 철학을 표현하는 일도 할 수 있으리라고. 그렇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