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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혜빈 Jun 11. 2023

무지개

불안한 작가에게 주는 위안

2018년, 아직 학생이던 여름 어느 날. 서울 동교동에 위치한 회의실에서 한참 거리미술전 작품 회의를 끝내고 밖을 나왔다. 방금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던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무섭게 땀이 삐질삐질 났다. 살인적인 햇빛.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만 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횡단보도로 가려고 고개를 살짝 들다가 깜짝 놀랐다. 저 건너편에, 찌는 더위만큼 답답한 건물들 사이로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개의 색깔이 걸려있었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파란 불을 기다리는 게 마치 그 무지개와 마주 보고 서 있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울로 잴 수 있을 것 같이 무거웠던 마음을 그 무지개가 가볍게 날려버렸다. 이건 가끔 가다, 정말 가끔 가다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무지개의 특별함이 가진 능력이었다.


파란불을 기다리며 그때의 난 생각했다. 약속의 증표라고 말해지곤 하는 무지개를. 내린 비 때문에 두려웠니? 난 널 지킬 거란다. 그 다정한 약속을.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지 겨우 몇 개월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남들보다 느린 발걸음으로 한 손에 꼽힐 만큼 몇 개 되지도 않는 작품을 끝내고 나서, 아직 흐름이랄 것도 없이 고작 발자국 몇 개 찍어놓고 내 안에서 꺼낼 것이 모두 사라지면 어떡하지? 혹시나 벌써 정체된다면 어떡하나? 시작과 동시에 끝을 생각했다. 오지 않은(을) 날들을 끌어다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나였다.


걱정은 왜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찾아오는지. 작품을 구상하고 제작하고 완성하는 그 과정 사이사이 실체 없는 불안이 계속 공격을 했다. 모든 것이 나와의 싸움. 혼자 작업하는 사람의 숙명이겠거니 하면서도, 작품 하는 것만큼 이렇게나 내 안의 확신을 요하는 일도 없겠다 싶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복잡한 생각을 지우듯 세수를 하다가 문득 몇 년 전 그날의 무지개가 떠올랐다. 떠올림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무지개. 나의 무지개. 삶은 살아있어서 맑을 때도 있다가 구름도 끼고 비도 내리며 요동치는데, 소망이란 건 그렇게 요동할 때마다 빼꼼히 얼굴을 내밀어 힘을 주는가 보다.


다시, 힘을 내보자. 마음을 다졌다.








2018년 무더운 여름 어느 날 동교동에서 마주한 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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