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가장 잘한 일을 고르라면 인문학 글쓰기 수업을 들은 것이다. 단순히 글쓰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철학에 대해 공부하고 이를 통해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연습을 한다. 그리고 나를 마주하면서 온전히 ‘나’의 이야기를 쓰는 법을 배운다.
수업은 총 6회로, 매주 1번씩 진행되는데 갈수록 사람들이 한 명씩 사라진다. 그만큼 나를 오롯이 마주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처음 과제를 제출할 때, 카페에서 노트북을 켜놓고 3시간을 멍하니 화면만 바라본 기억이 난다. 그냥 내 이야기를 쓰라는데… 대체 무엇을 써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남들이 보기에 예쁜 글을 썼다. 마치 인스타그램 돋보기를 누르면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감성 글 말이다. 하지만 다 쓰고 천천히 읽어보니 다른 사람의 옷을 입은 것만 같았다. 내 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글을 지웠다. 다시 백지였다.
뭐부터 시작할까 곰곰이 생각하다 최근 내 감정을 나열해 보았다. 바로 떠오르는 감정은 ‘열등감’ 그리고 ‘불안함’이었다. 그러면 난 왜 열등감을 느끼고 불안할까? 계속 내 감정의 근원지를 파고 들다보니 어떤 지점에 도달했다. 내가 이 감정을 느끼게 된 계기말이다. 그걸 발견한 후에는 30분만에 글을 완성할 수 있었다. 신기했다. 내 결핍에 대해 마주했을 뿐인데 글이 이렇게 쉽게 써지다니.
처음으로 마주한 솔직한 내 글은 문체가 투박하고 딱딱했지만 왠지 모를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찾아헤매던 나를 만난 것 같았다. 괜시리 눈시울이 붉어졌다.
첫 과제에 대한 선생님의 피드백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자신을 깊게 응시하는 기회를 잡은 걸 축하한다는 따뜻한 한 마디. 나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열었으니 이제 열린 문으로 산뜻한 바람이 들어오고 따뜻한 햇살이 비칠 거라는 응원. 나의 결핍을 마주하며 작품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수업에서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변신>으로 유명한 프란츠 카프카는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에서 아버지에게 겪은 고통과 분노의 감정을 잔뜩 표출한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이 받은 상처는 참 치료하기 어렵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런 결핍이 있었기에 카프카는 위대한 소설들을 많이 창조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라며, 고통은 예술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고 말씀하셨다.
동의한다.
글쓰기는 반드시 결핍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나의 찌질하고, 쪼잔한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 문장의 불꽃이 터지기 때문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잘하고 싶은 나, 열등감에 가득찬 나를 온전히 마주하고 나니 시야가 맑아졌다. 가장 마주하기 무서웠던 나를 만난 순간, 나만의 글이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나의 결핍을 사랑한다. 내 삶 속의 고난과 시련이 하나의 작품이 되어줄테니. 우습지만, 최근엔 친구에게 그런 말을 했다. 우리 더 많은 결핍을 만들자고. 그리고 우리만의 찬란한 작품을 만들자고 말이다. 찌질한 나를 인정한 지금, 생각보다 기분 나쁘지 않다. 결핍을 통해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