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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bbers Jan 08. 2021

성장은 지겹다

-첫사랑-

우리 가족은 이사를 많이 다녔다. 평균적으로 일 년에 한 번은 이사를 갔고, 어쩔 땐 일 년이 채 안되어서 이사를 갈 때도 많았다. 그래서 나에게 이사란 그리 큰일이 아니었고, 대수롭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이사 가는 게 원망스러웠고, 엄마 아빠가 어쩌면 정착하는 걸 싫어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사 가기 5개월 전 어느 날 나는 예은이랑 동네에서 놀고 있었다. 둘이서 동네 야외 운동장에서 줄넘기를 하는데, 갑자기 내 줄넘기에 공이 걸렸다. 어디서 굴러온 공일까 하고 뒤를 보는데, 어떤 남자애가 뛰어오고 있었다. 보통 첫사랑이라고 해서 첫눈에 반한 경우가 많다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제 와서 첫사랑의 환상을 깨서 조금 미안하지만, 내 눈엔 피부가 까만, 키는 나보다 조금 큰, 그리고 눈이 나를 닮아 작은, 한국 남자애가 뛰어오고 있었다. 저런 애가 우리 동네에 있었나 싶었을 때, 그 애가 뛰어와서 미안하다고 영어로 말했다. 그런데 내가 쑥스러웠는지, 고개를 끄덕이곤 줄넘기를 다시 시작했다. 너는 공이나 가져가라는 차가운 태도로 줄넘기를 시작했는데, 공을 들고 가려는 그 애의 귀를 줄넘기로 쳤다. 순간 얼굴이 빨개졌다. 미안한 것도 있지만 너무 창피했다. 도도한 나의 모습이 오히려 사람을 해한 게 너무 부끄러웠다. 그 애도 귀를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 애가 한국어를 못할 줄도 모르는데, 나는 '야, 너 괜찮아!?'라고 소리쳤다. 정말 반사적으로. 그런데 그 애가 '응'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너 한국인이야?'라고 물으니, 다시 '응'이라는 대답이 들렸다. 예은이도 그제야 괜찮냐며 걱정스럽게 다가왔다. 나도 다가가서 나도 모르게 귀를 감싼 그 애의 손을 만지며 미안하다고 했다. 너무 많이, 그리고 빨리 말해서 랩처럼 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러자 그 애가 웃었다. 그때부터 아마 나는 그 애를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웃는 게 그렇게 이쁜 남자애는 처음이었다. 심지어 보조개도 있어서, 웃을 때 보조개가 점점 깊어지는 걸 보며 신기했다. 우리 셋은 운동장 구석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그 남자애를 가운데에 앉히고 나랑 예은이는 마치 취조하듯이 그 애의 이름, 사는 곳, 학교, 한국어 얼마나 할 줄 아는지, 등등 꼬치꼬치 캐물었던 것 같다. 놀랍게도 그 애는 우리의 질문들에 다 대답해 주었다. 그 애의 이름은 신기했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었는데, 보통 '신사의 나라'라고 하는 나라랑 같은 이름이었다. 그 애는 우리 집과 5분 거리에 살았고, 학교는 달랐다. 그 애는 축구를 좋아한다고 했다. 얼마만큼 좋아했냐 하면, 매일매일 축구경기를 보고, 운동장에서 축구 연습을 하고, 좋아하는 옷도 빨간색 축구 유니폼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얼마나 좋아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축구 얘기를 시작하자마자 그 애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바뀌었다. 그걸 보고 나는 왜인지 모르게 부끄러워했던 것 같다. 왜인지 모르게.


그날 이후로 나랑 예은이가 놀 때마다 그 애와 자주 마주쳤다. 마주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내가 예은이에게 자꾸 운동장에 가자고 하는 날이 많아진 것이다. 처음엔 그 애가 축구하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애랑 같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또 어느 날은 그 애의 집으로 가서 축구경기를 같이 보았다. 그렇게 하루가 다 가도록 그 애랑 놀면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러다가 식겁한 날도 있었다. 그 애랑 축구를 하고 나서 기진맥진하게 예은이랑 집에 돌아갈 때, 예은이가 갑자기, '쟤, 되게 왕자님 느낌이야'라고 말했다.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서, '응?'이라고 대답했는데 음이탈이 났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해졌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빨개졌다. 마음속에선 별의별 생각을 다했던 것 같다. '설마, 좋아하는 건가?', '좋아한다고 하면 어떡하지?', '좋아한다고 하면 잘되라고 해야 할 텐데 진심이 아닌 게 티 나지 않을까?'라고 혼자서 멍 때리며 생각한 것 같다. 그런데 예은이가, '응, 우리 공주놀이하는 거 있잖아, 걔는 왕자님 하고, 너는 공주 하면 되겠다!'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울었던 것 같다. 이렇게 좋은 친구가 있나 싶어 감격스러웠다. 역시 내 친구였다. 내가 얼굴에 다 티가나 게 행동하는 것도 없지 않아 있지만, 예은이는 항상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던 것 같다. 이번에도 내 생각을 읽었겠지 라는 마음에 예은이에게 걸었던 팔짱을 더 세게 걸었던 것 같다. 예은이는 내 편이었지만, 세상은 넓고 애들은 많았다. 영국이와 거의 다 친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시은이라는 아이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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