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이소라의 <음악도시>에서 2004년의 느낌표까지
그토록 원하던 꿈을 이루고 나서야 내가 꾼 꿈의 정체를 알았다.
텔레비전 속 화려함을 만들어내는 이 직업이 많은 이들의 뼈와 살, 자존감을 깎아가며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는 걸 서른 여섯이 되어서야 완벽하게 알았다. 변할 수 있다고 믿었고 변할 거라고 기대했으나, 내가 작가 12년차가 될 때까지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내가 겪은 것을 하나씩 풀어보려고 한다.
좋아했던 내 일을 욕하는 이 감정은 지독한 애증이다. 늘 그만두고 싶지만 그만둘 수 없어서, 결국 꿈꾸던 그 시절을 그리며 마음을 다잡는 끔찍한 애증이다. 사실 이 매거진 또한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아이러니한 발악이다.
내 꿈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었다.
누군가를 지켜주는 영화를 보면 보디가드가 되고 싶었고 무술을 다루는 영화를 보면 무예인이 되고 싶었으며 어쩌다 옳은 일에 뿌듯함을 느끼면 경찰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또 어느 날엔 요상한 정의감에 불타서는 특수 교육 교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영화 국화꽃 향기의 박해일을 보고 연극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때쯤이었지 싶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 그런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게.
시작은 라디오였다.
중학생이던 나는 밤늦게까지 공부를 한다고 핑계되며 라디오를 들었다. 귓가를 간질이는 DJ 이소라의 목소리와 가끔 방송이 불가능할 정도로 깔깔깔 터지던 웃음은 음악도시만의 묘미였다. 그리고 자주 언급되던 이름이 있었는데, 그게 미나 작가였다.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기에 연예인과 친분을 자랑하고 긴 시간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걸까 궁금했다. 그러다 <그 남자 그 여자>라는 코너에서 읽어주던 글이 책으로 출간되고 나서야 나는 작가의 글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이런 직업도 있구나. 매력적이다. 그 이후, 하루에도 몇 번씩 라디오 오프닝 원고를 쓰고 내가 DJ가 된 것처럼 서울말을 흉내 내며 시간을 보냈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꿈의 구체화가 필요했다.
대학과 직결되는 문제였으니까. 그러나 그 시절엔 작가에 대한 정보가 희박했다. 선례도 없었고 그 분야를 알고 있는 선생님도 없었다. 그러다 TV 프로그램 느낌표에 빠지게 됐고 (요즘 말로 국뽕이 차는) 정의감에 넘쳐 장기 기증을 하고 나서는, 꿈이 방송 구성 작가로 확대됐다. 다행히 라디오보다는 TV 쪽이 정보 찾기에 수월했다. 방송작가 과정이 있는 학점 은행제 대학과 방송 아카데미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됐으니 제법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입시는 혼자의 몫이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홀로 선택한 학점 은행제 대학의 면접에서 광탈하고 나는 정시를 준비해야 했다. 선생님은 얼추 비슷한 국문학과나 신문 방송 학과를 제안했지만 내가 선택한 건 사진과였다. 방송 구성작가는 글이 아닌 이미지를 쓰는 작가였고 그러려면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 무렵 내가 가장 좋아하던 게 사진 찍는 일이었기 때문에 전공을 정하는 건 아주 빠르고 수월하게 진행됐다.
이후, 나는 사진을 전공하고 방송 아카데미를 거쳐 MBC 프로그램으로 정식 막내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꿈을 이뤘다는 사실에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래. 아주 많이 행복했다.
어떤 일을 겪어도 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이 행복했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