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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시 감별사 Oct 29. 2022

소도시 DNA

4-2 목포 남도 답사 일번지 해남과 강진

본격적으로 전라남도를 다닌 것은 2014년부터지만 남도는 나의 첫 국내 배낭 여행지였다. 대학 4학년 복학생이던 나는 1993년 첫 출간되어 열풍처럼 답사여행의 붐을 일으킨 화제작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편을 보고 남도 답사 일번지로 소개된 강진, 해남일대 여행을 동경하게 됐다. 


그러다 졸업반이던 여름 마침내 직장인이었던 대학 친구 승현이와 승현이의 친구 한 명까지 의기투합해 셋이서 실행을 옮기게 된다. 더운 여름 배낭까지 짊어지고 뚜벅이로 강진과 해남 일대를 3박4일간 돌아다녔는데 책에 나온 대표 명소인 해남 대흥사, 땅끝마을, 강진의 다산초당, 백련사 등은 물론 배를 타고 보길도까지 들어가 윤선도 유적지와 해수욕까지 알차게 즐겼다. 인터넷이 아직 없던 시절, 대중교통을 이용해 책과 현지에서 부딪혀 얻은 정보로만 다녔는데 여자 셋이라고 겁도 없이 흥정해서 개인 배도 타고 히치하이킹도 했던 ‘어마무시한’ 여행이었다. 


여행을 직업으로 삼게 된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대학 4학년 때 휴학을 하고 다녀온 필리핀 9개월살이와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빼놓지 않고 꼽는다. 남도로의 첫 여행이라 그런지 지금도 그때의 여행이 잊혀지지 않는다.  


대학졸업반 여행지로 강진, 해남을 택한 데에는 책의 영향도 컸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해남은 엄마의 고향이다. 어렸을 때부터 자주 오갔고 심지어 유년시절 대부분을 보냈던 아버지의 고향 의성과는 달리 어머니의 고향 해남은 늘 엄마와 이모들이 나누는 대화에서만 엿들었던 미지의 세계였다. 그런 고장이 답사여행의 열풍을 이끌던 책의 첫 목적지로 거론되니 궁금증이 커져만 갔다. 


해남을 못 가본 이유는 엄마가 10대 후반이었던 때에 외가 식구들이 전부 인천으로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명절이나 외할아버지 제사, 외할머니 생신 등에는 인천을 방문했다. 해남을 직접 가보기 전 해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엄마, 정확히는 큰 이모가 해주시는 김치에서 였다. 


집안 막내여서 요리를 잘 못했던 엄마를 대신해 큰 이모는 향상 김치를 담궈 주셨다. 심지어 평택에 살고 계시던 이모는 엄마를 보러 오실 때면 늘 김치 두어 가지는 해서 이고 지고 갖고 오셨다. 내 기억에 열무김치가 무엇보다 맛있었는데 젓갈과 양념을 풍족히 쓰면서도 비리지 않고 깊이가 있었던 것 같다. 이후 목포와 해남 등을 갔을 때 먹어본 김치에서 그 옛날 이모가 해주셨던 맛이 났다. 인천 외갓집에 가면 늘 홍어무침과 양념게장이 빠지지 않고 상 위에 올랐다. 짠지가 많은 경상도식 요리에 길들여진 아버지는 해산물로 상이 풍요로운 외갓집 요리를 참 좋아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경상북도식 요리와 전라남도식 요리에 모두 길들여진 나는 이후 여행을 직업으로 택하면서 가장 큰 장점으로 ‘입맛’을 꼽는다. 국내는 물론 해외 어디를 가도 음식 적응은 쉬웠다. 웬만하면 뭐든 잘 먹었다. 


해남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내 시선을 사로 잡은 것은 드넓은 평야다. 늘 시골하면 산이 많던 경상북도와 강원도(친가는 의성에서 강원도 정선으로 이사했다)의 풍광만 떠올리던 내게 지평선이 보일 것 같이 넓은 논이 펼쳐지던 해남의 땅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리책에서 보던 호남평야가 눈 앞에 있는 것이다. 여름이라 푸릇했는데도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해남의 농촌마을 가난한 농부의 막내딸인 엄마가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와 결혼을 할 줄이야 엄마도 몰랐겠지. 대한민국 남한 땅에서 서로의 존재조차 모르던 남녀는 20대에 서울에서 만나 1970년대 초 결혼을 했다. 청량리역으로 상경했던 경상도에서 올라온 이들이 터를 내렸던 중랑구 면목동에서 첫 살림을 시작했다. 당시는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고 산업화를 가속화 하던 격동의 시기였다. 


격동의 시기였던 만큼 엄마는 참 많은 일을 하셨다. 한국의 많은 엄마들이 그렇듯 자식들 먹이고 공부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나는 맏이로 태어나 외모와 성격 등이 아빠를 쏙 빼닮았다고 엄마는 늘 푸념아닌 푸념을 내게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난 엄마 또한 많이 닮은 것 같다. 특히 여행을 일로 삼았던 내 성격의 상당부분은 엄마의 유전적 요인이 강하게 작용한 것 같다. 


일단 엄마는 매우 사교적이며 가만히 엉덩이 붙이고 오래 있는 꼴을 못보는 사람이었다. 서울은 물론 지방 여기저기를 참 많이 다녔다. 보험 영업을 약 20년 가까이 했을 정도다. 늘 본인은 숫기 없다고 말씀하시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가서 이런 저런 대화도 잘 붙이고 무뚝뚝한 나와는 달리 말도 참 나긋나긋하신다. 1949년 생인 엄마는 좀 더 늦게 태어나 공부를 더 했더라면 엄마는 꽤 유능한 커리어우먼이 되었을 것 같다. 


강진은 대학 4학년 때 처음 가본 이래 한참의 시간이 흘러 2015년에 두 번째 방문을 했는 데 날씨가 매우 안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멋진 고장이었다.  추사 김정희, 정약용, 윤선도 등 조선 후기 걸출한 학자들과 예술가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해남, 강진에 이어 고흥, 영암 등 주변 도시를 그제서야 둘러보았다. 너무 뒤늦게 남도의 매력을 알게 된 것은 아닐까 조바심이 났다. 


아울러 경북의 아버지와 전남의 어머니를 부모로 두게 된 나의 유전적인 요인들이 왠지 모를 자부심이 되어주었다. 어느 지역이라도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유연성은 내 부모님께 받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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