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지난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전통시장에는 여전히 전들의 향기가 이어진다. 하얀 생선살이 포슬하게 씹히는 동태전부터 알록달록 예쁜 빛깔과 맛의 삼색꼬치전, 촉촉함이 매력적인 호박전, 향긋한 표고전까지… 또 비오는 날이면 집에 남은 신김치에 어머니가 뚝딱 부쳐주시는 김치전, 잠들기 전 막걸리가 생각날 때 쫀득하게 부쳐먹는 감자전 등 맛있는 전들이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문다. 상상만으로도 군침이 도는 ‘아는 맛’이 무서운 전. 오늘은 조금 더 특별한 전들을 소개해본다.
#부침가루는 그저 거들뿐…청송 ‘달기 약수마을 식당’의 ‘두릅전’
경상북도 청송은 첩첩산중 피톤치드 내음이 가득한 인적 드문 청정 마을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고의 약수터라 불리우는 청송 달기약수탕. 철분 가득 약수가 마을 곳곳에서 나는데 그 주변은 약수 특유의 철분 영향으로 빨갛게 변해 있다. 토종닭으로 만든 백숙과 닭불고기를 맛보러 멀리서 손님이 찾아오는 유명한 곳이지만 이곳의 진짜는 사실 따로 있다. 그건 바로 두릅을 팬에 한가득 넣어 지진 ‘두릅전’. 두릅은 워낙 비싸 그냥 데쳐먹기에도 조심스러운 재료다. 하지만 그 비싼 두릅을 때려 넣어 전을 부쳤다면? 부침가루를 눈 씻고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최소한으로, 보름달 같은 전을 호방하게 부쳐냈다면 다른 말이 필요할까? 그것도 주왕산의 자연산 ‘산두릅’으로 말이다. 이 보물 같은 전의 가격은 단돈 1만원. 믿기지 않는 가격이다. 요즘 시세로 서울에서는 두릅 한 단도 사지 못할 초 저렴한 가격이다. 다만 산두릅 제철인 4~5월쯤 계절메뉴로만 맛 볼 수 있다는 유일한 단점이 있다. 강한 불로 짧게 바짝 지져낸 두릅전의 겉은 바삭바삭 안은 촉촉, ‘겉바안촉’의 끝판왕이다. 한 입 베어물면 0.2초 크리스피한 잠깐의 순간이, 직후에 푹신하고 풍만한 두릅 몸체로 이가 쑥 파고들면서 특유의 쌉싸름한 향기가 콧속으로 불쑥 찾아들며 자연산 의 위풍당당한 면모를 과시한다. ‘청송’이 ‘칭송’되는 순간이다.
#호두가 사방팔방 콕콕, 천안 ‘태화식당’의 ‘호두전’
우리나라에 호두나무를 처음 심은 곳으로 알려진 충청남도 천안의 광덕사(廣德寺).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호두나무가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광덕사가 위치한 광덕산 주변에는 산을 따라 내려오는 계곡에 발을 담그고 백숙을 먹을 수 있는 식당들이 곳곳에 있다. 그 중에서도 산 초입에 가장 가까이 위치한 ‘태화식당’은 이 동네에서 손꼽히는 노포다. 식당에 들어서면 각종 신기한 재료들로 담근 술과 토종꿀, 칡즙 등 직접 채취한 임산물들을 판다는 알림판이 빼곡하다. 원래 능이버섯 가득 넣어 끓이는 백숙, 시골비빔밥 등 직접 채취한 임산물로 만드는 건강한 음식들이 주메뉴지만, 호두전은 태화식당만의 특별한 메뉴 중 하나다. 광덕산 인근에 특산물인 호두를 이용해 전을 부치는 집이 몇 군데 있긴 하지만 맛과 비주얼 모두 나는 단연 이 집을 최고로 꼽는다. 도토리가루로 까무잡잡한 반죽을 만들어 부추, 당근, 양파, 그리고 호두를 양 껏 넣어 전을 부쳤다. 호두를 부숴서 토핑하는 정도의 찬조 출연이 아니고 호두의 존재감을 뽐내는 전이다. 전에 있는 야채들이 익으며 야들해지고, 반죽은 이들과 섞여 전반적으로 촉촉한 식감도 가지고 있는데 바삭한 호두가 곳곳에서 강렬한 인상을 준다. 팬에 그을리며 노오랗게 구워진 호두는 고열에 고소한 향이 두 배, 빵냄새마저 풍겨온다. 호두 알의 수분이 날아가 더욱 오독오독 재미지게 씹힌다. 평소 호두의 기름 맛에 부담감이 있는 사람들도 잘 먹는 남녀노소 좋아할 맛이다. 그야말로 건강과 맛, 비주얼까지 잡은 세 마리의 토끼를 잡은 기특한 전이다.
#눈내린 강원도의 산골을 연상시키는 영월 ‘주천묵집’의 ‘도토리전’
주변엔 온통 험한 산과 끝없이 펼쳐진 논밭뿐, 처음 찾아가는 이들에게 식당이 과연 존재할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인적 드문 강원도 산골에 위치한 주천묵집. 주말이면 전국에서 손님이 찾아오는, 3대째 손맛을 이어오는 영월의 대표적 노포다. 직접 만든 도토리묵이나 제철 산나물들로 한 상 가득 푸짐히 내주는 반찬들까지 하나하나 맛있지만 전무후무한 비주얼을 가진 도토리전은 꼭 한번 찾아가서 먹을만 하다. 당근, 쪽파 등 각종 야채에 도토리가루를 되직하게 버무려서 바삭하게 튀기듯 지져낸 도토리전. 밀도 높은 반죽 덕에 야채는 얼기설기 그물처럼 , 전에서 가장 중요한 가장자리 부분은 야무지게 잘 익어 나온다. 구석구석 바삭함과 고소함이 진동한다. 주천묵집 도토리전의 하이라이트는 단순히 잘 익은 야채가 아니라, 전 가운데에 두부를 눌러 함께 지진 점이다. 마치 피자 위에 흩뿌려진 뽀얀 피자치즈를 생각나게 하는 게 강원도 산골 구석구석 내려 아직 녹지 않은 눈을 연상시키킨다. 두께마저 딱 씬(thin) 피자다. 전은 맛간장을 찍어 먹어도 맛있지만 주천묵집만의 자랑, 다진 고추 절임을 얹어서 먹으면 그야말로 꿀맛이 따로 없다.
#그래도 오리지널은 못잃어…서울의 전 맛집
한식 주점의 대명사 ‘락희옥’. 불고기, 보쌈도 잘하고 육전이나 민어전도 한정식 느낌을 살려 깔끔하게 내지만, 굴전이 그중에서도 우등생이다. 락희옥의 굴전은 굴의 미네랄리티를 한껏 끌어 올린 센티멘털한 맛. 이곳 저곳 굴전 좀 한다는 집에서 꽤나 먹어봤지만 락희옥처럼 ‘아슬아슬하게’, ‘터질 듯 말 듯한’ 경계를 잘 살려내 달걀물에 살포시 담은 곳을 아직까진 찾지 못했다. 그야말로 한껏 물오른 굴의 참맛이다.
논현동 ‘한성칼국수’. 칼국수 전문점을 표방하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푸디들 사이에서는 칼국수 보다도 ‘새우전 맛집으로 이름 날리는 곳이다. 칼국수를 먹었으나 대하의 탱글한 살이 터질 듯 살아있는 새우전. 한성칼국수의 새우전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달걀물의 환상적인 소금간 비율이 아닐까 한다. 다른 재료보다도 유독 새우전에서 찰떡궁합이다. 새우전의 허리를 이로 한번 지그시 누를 때마다 달걀옷 안으로 새우의 육즙이 핑그르르 피어나온다. 감칠맛이 이루 말할 수 없다.
푸드칼럼니스트 김새봄(spring586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