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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2, paris_로댕 미술관과 세상의 끝

by sseozi

멀리서도 황금 지붕으로 존재감을 뿜어대던 앵발리드와 달리, 로댕 미술관은 건물들이 벽을 맞대고 늘어선 골목 안에 숨어 있었다. 옆을 지나면서도 그저 벽인 줄 알고 무심코 지나치다가 담 사이에 난 대문을 발견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비로소 미술관 건물과 정원 일부가 보였다. 누군가의 사적인 공간에 초대된 듯한 조심스러운 기분이었다. 실제로 이곳은 로댕이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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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입구는 비 내리는 와중에 입장과 짐 검사를 기다리는 관람객들로 다소 복잡했다. 발길이 자연스럽게 인파가 덜한 정원 쪽으로 향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생각하는 사람’ 동상이었다. 장미가 늘어서고 원뿔 모양 침엽수가 둘러선 가운데에 거대한 체스 말처럼 동상이 놓여 있었다. 고뇌라든가 고독이라든가 하는 무거운 주제가 다소 거칠게 표현된 작품인데, 장미꽃이 활짝 핀 정원 한가운데 곱게 놓여있어 약간 의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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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더 커다랗고 생각보다 더 앞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어떤 표정일지 궁금해 동상 바로 아래에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검푸른 낯빛에 표정은 더 어두운 얼굴이 온 시선을 사로잡으며 내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끝없는 고민에 빠져있는 불끈불끈 근육남을 한동안 바라보다 발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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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앞으로 넓은 정원이 곧게 뻗어 있었다. 잔디밭이 길게 펼쳐진 양옆으로, 우거진 나무와 각지게 다듬은 나무가 한데 섞여 늘어서 있었다. 잔디가 끝나는 곳엔 조각상을 둘러 세운 둥근 연못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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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이 심긴 나무에 가려서 두꺼운 담장은 보이지 않았다. 바깥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고요한 곳이었다. 정원에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더 유유자적하는 기분이었다. 넓게 쓴 공간과 잘 관리한 초목에서도 왠지 부내가 난달까. 로댕은 분명 부자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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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사이로 난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꽃과 수풀이 우거진 사이사이에 조각상이 나타났다. 비스듬하게 엉거주춤 서 있는 화가, 유난히 긴 팔다리에 굽은 자세로 느적느적 걷는 사람, 현대무용의 한 장면 같은 조각상, 무슨 자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꾸만 시선이 가는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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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색의 동상들은 비에 푹 젖어 더욱 진한 빛을 냈다. 윤기가 흐르고 요철도 더욱 부각되었다. 그래서인지 깊은 침묵이 감도는 표정들도 한층 더 무겁고 선연하게 느껴졌다. 비 오는 날의 로댕 미술관이라니, 정말 운이 좋은 것 같아, 생각하며 습기로 가득 찬 정원을 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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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또 인생작을 마주치게 된다. 로댕 작품의 정수들을 한데 모았다는 ‘지옥의 문’이다. 말 그대로 거대한 문이었는데, 아우성 그 자체였다. 한 작품 안에 도대체 몇 가지 이야기가 들어있는 건지, 어디다 눈을 둬야 할지 정신이 없었다.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과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거대한 문에 흡수돼 뒤엉켜 있었다. 아우성 속에 발버둥 치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아가는 해골이 있었고, 떨어지지 않으려 온몸으로 버티고 있는 어린아이도 보였다. 문 꼭대기엔 세 명이 서로 기대어 선 조각이 있었고, 그 아래엔 생각하는 사람의 축소판이 이 모든 아비규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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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 꿈틀거리며 요동치고 있어서 가까이 갈수록 비명 섞인 아우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검은빛인데도 들끓는 용암을 보는 듯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모든 구석을 샅샅이 살피며 정신없이 보고 또 보았다. 이 걸작을 내 인생에 다시 보긴 힘들 거란 생각에, 차고 넘치도록 눈에 담으려 했다. 원 없이 넋을 잃고 있는 동안 등 너머로 몇 사람이나 작품 감상을 마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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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빗줄기가 굵어졌다. 사진도 온통 쏟아지는 빗자국투성이였다. 옷도 머리도 다시 젖어 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눈에 담지는 못했으나, 원 없이 봤다고 생각될 즈음, 지옥의 문을 뒤로 하고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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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은 무척 예뻤다. 네모난 방들이 나란히 이어진 형태였는데, 심플하고 아늑하고 깔끔한 느낌이 참 좋았다. 이제껏 다른 건물에서 본 화려한 방들과 완전히 달랐다. 그래도 프랑스는 프랑스인지라 화려한 방도 있긴 했지만, 다른 곳에 비하면 모던함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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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장식만 새겨진 새하얀 천장 아래 푸른빛을 띤 차분한 회색의 벽이 이어지고, 그 아래 조각조각 예쁘게 짠 나무 바닥이 깔렸다. 방 너머 방마다 깔끔한 하얀 격자창문이 빛을 가득 들이고 있었는데, 그 안에 하얀 석고, 황토색 점토, 검푸른 청동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작품 배치도 방마다 다르고 중간중간 회화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서 지루할 새 없이 관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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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의 작품들은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러웠던 루브르 박물관의 르네상스 시절 대리석 조각들과 확연히 달랐다. 어딘가 덜 다듬어진 듯, 회화로 치면 붓 터치가 고스란히 보이는 듯한 느낌이랄까. 의도적으로 만들다 만 것처럼 손길이 배제된 부분도 있었다. 로댕에 이르러서는 아름다움과 위대함이 주제였던 시대를 벗어나 좀 더 인간 본연의 것, 역동적인 날 것을 말하는 작품이 나오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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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 미술관에서 또 흥미로웠던 것은 수많은 습작을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다양한 재료와 크기의 ‘생각하는 사람’, ‘지옥의 문’을 보았다. ‘지옥의 문’의 구석구석을 부분별로 몇 번이고 가작을 만들고 수정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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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작품 외에도 이미 관람하며 지나온 작품이 다른 형태로 또 나타나는 일이 많았다. 어떤 방은 여러 포즈의 손과 몸통을 연습한 것이 벽에 한가득 걸려 있기도 했다. 로댕이라는 이 놀라운 장인이 얼마나 집요하고 고통스럽게, 그러나 열정적으로 작품활동에 임했는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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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숱한 작품들을 보고 난 후 마주친 로댕의 초상화에서 책상 위에 얹은 그의 두툼한 손이 오래오래 마음에 남았다. 이 작품들은 모두 저 손끝을 거쳤겠구나. 세기의 예술가도 이렇게 수도 없이 연습하고 갈고 닦았는데, 나 같은 하찮은 범인은 더욱 열심히 살아야겠다며 새삼 반성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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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하고 깔끔한 방마다 다른 모습으로 채워진 역동적인 조각들을, 나 또한 차분하지만 매 순간 동요하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짚어나가며 관람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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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오후 5시쯤이었다. 아직 식당들은 브레이크 타임일 터였다. 이참에 맛있기로 유명한 프랑스의 빵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글맵으로 가까운 빵집 중에 별점이 높은 곳을 찾아 목적지로 삼았다.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작은 빵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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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정을 무사히 마친 개운한 마음으로 구글맵을 보며 신나게 걸어가는데, 도중에 공사로 길이 막힌 게 아닌가. 우회하는 길을 찾아가는데, 지도와 맞지 않아 당황하려던 찰나, 마침 길에 경찰 아저씨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얼른 가서 짧은 영어로 길을 물었다.


“Where am I?(여긴 어디, 난 누구?)”

“Where are you going?(어디 가는데?)”

“At the end of the world.(세상의 끝)”

“What…?!(뭐…?!)”


‘At the end of the world’는 내가 가려는 빵집 이름이었다. 당황한 경찰 아저씨는 구글 지도를 확인한 후에야 안심하며 상냥하게 길을 알려주었다. 가는 길에 자꾸만 방금 전의 대화가 떠올라 웃음이 났다. 비에 젖은 웬 아시안 걸이 와서 세상의 끝을 찾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짧은 영어로는 그게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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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도착한 세상의 끝 빵집은 어릴 때 흔히 보았던 동네 제과점 느낌이었다. 노란 조명에 주황색 나무 테이블이 서너 개 놓여 있고, 카운터 옆에 놓인 가슴높이의 쇼케이스에는 다양한 토핑의 파이와 타르트가 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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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카푸치노와 사과 타르트를 주문했다. 달콤 쌉싸름한 사과 향이 선명하게 입안 가득 퍼지는 그 맛은 말해 뭐해. 아는 맛인데 정말 맛있다. 진짜 맛있다. 맛있게 달콤 상큼해서 시원한 느낌마저 든다. 마음속으로 환호하며 조용히 맛나게 먹고 있는 나의 옆자리에선, 일상의 한 장면이라는 듯이 어린 소녀와 아빠가 빵을 먹고 있었다. 내내 동네 주민들이 오가며 빵을 사 갔다. 길거리엔 관광객 하나 없어서 그들의 일상에 나 혼자 살짝 들어온 기분이었다. 맛있게 당과 카페인을 채우고 귀가하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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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원이네 집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릴 예정이다. 이번에도 파리 시내 한복판에서 환승해야 한다. 하루 종일 많이 걸어서 그런지 지하철 안에서 금세 배가 고파졌다. 파리 시내를 누비며 다음 지하철로 환승하러 가는 길에 KFC를 발견하자마자 심장이 벌렁거렸다. 원래 여기 오려던 사람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들어가 또 아는 맛으로 배를 채웠다.


허기를 달래고 이제는 정말 귀가하기 위해 환승할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뭔가 잘못됐는지 개찰구가 자꾸 전철표를 인식하지 못하고 뱉어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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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표소에 문의하려고 가보니 이미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었다. 긴 줄의 끝에 뒤이어 섰는데, 일 처리가 그렇게 느릴 수가 없다. 화장실까지 가고 싶어지는데, 창구 직원은 일을 빠르게 처리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너무 답답했다. 하지만 누구도 화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으레 그러려니 하고 적당히 포기한 태도로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 파리 사람도 화내지 않는데 외국인이 화낼 수는 없지. 이런 거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 매사에 너무 열심히 일하는 거 아닌가, 우리는 정말 서로에게 화내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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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이 지나 나의 순서도 돌아왔고 새 티켓으로 교환했다. 오늘도 지친 몸이었지만 그래도 무사히 희원이네 집으로 돌아왔다. 연어 롤과 KFC를 먹었다는 이야기에 희원이와 형부가 너무나 안타까워하며 밤 9시에 스테이크를 구워줬다. 이히, 너 없었으면 나 정말 어쩔 뻔했어, 뿌엥. 둘째 날 밤도 맛있는 음식과 함께 이히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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