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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2, paris_빗 속의 앵발리드

by sseozi

둘째 날이 되어도 하늘은 회색빛으로 꾸물꾸물했다. 오늘은 로댕 미술관에 갈 예정이라는 말을 듣고 형부가 앵발리드(Les Invalides)라는 곳을 알려줬다. 앵발리드에는 나폴레옹 무덤과 군사 박물관이 있는데 워낙 웅장하고 멋진 데다, 로댕 미술관과 매우 가까우니 함께 두루 보고 오기 좋을 것이라며 추천해줬다.


대문자 P라 원체 여행 일정을 꼼꼼하게 짜지 않는 편이기도 했고, 이히와 형부가 더 좋은 곳을 알려줄 거 같아서 언제든 일정을 변경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뒀었다. 그래서 형부의 추천이 몹시 반가웠다. 앵발리드 바로 접수 완료!


둘째 날에는 혼자서 Saint-Maur-Creteil역으로 향했다. 오늘은 투어 참여 없이 오롯이 혼자 여행할 거라 시간에 쫓기지 않고 유유자적할 수 있다. 보조배터리를 특별히 신경 써서 잘 챙겨두었다. 1분 1초가 귀한 일생일대의 여행인데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지. 날씨가 여전히 흐리고 쌀쌀했지만, 어제보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거리를 구경하며 찬찬히 걸었다. 멋진 점심 식사를 위해 앵발리드 근처의 맛집도 미리 찾아놨다.


이날 처음으로 파리의 지하철 환승에 도전했다. 역 안에서 환승이 가능한 우리나라와 달리, 파리에서는 아예 지하철역 바깥으로 나온 뒤 갈아탈 노선의 역까지 도보로 이동해야 한다. 상당한 도전과제가 아닐 수 없다.


오늘의 환승 노선은 RER선을 타고 가다 파리의 오베르(Auber) 역에서 내려 바깥으로 나온 뒤, 8호선 환승역인 오페라(Opera) 역까지 5분 정도 걸어서 찾아가야 하는 노정이다. 처음에는 낯설고 두려웠다. 역을 완전히 빠져나와 복잡한 거리를 헤매며 환승역을 찾아가는 이 길이 정녕 맞는 건지, 구글 지도를 보면서도 불안했다.



오페라 가르니에 등장, 두둥


하지만 오페라 역을 향해 걸어가는 길에 생각도 못 한 오페라 가르니에를 마주친 순간, 온 마음이 탄성을 지르며 불안을 날려버렸다. 차와 인파로 북적이는 좁은 도로 옆에 ‘두둥!’하고 시야를 가득 채우며 오페라 가르니에가 나타났다. 한 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외관과 우아한 옥색 돔,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날개를 펼치고 지붕 위에 올라서 있는 황금상. 주변을 압도하는 화려함이었다. 오페라 가르니에 혼자 150년 전의 화려한 파리에 있는 듯했다.


20240601_120231.jpg 오페라 가르니에를 지나쳐가는 중


여행 전에 예술가들의 파리 시리즈를 읽지 않았다면, 당시 파리에서 기념비적인 역할을 한 오페라 가르니에라는 건물이 있었다는 걸, 지금 옆을 지나고 있는 이 건물이 ‘오페라의 유령’의 배경인 바로 그 건물이라는 걸 모른 채 지나쳤을 것이다.


오페라 가르니에와 마주친 뒤부터 파리 시내를 누비는 환승 타임을 즐기게 되었다. 특히 오페라 역에서 환승할 일이 많았는데, 매번 마주치게 되는 오페라 가르니에가 너무 멋져서 이곳을 여행 일정에 넣어야 하는 게 아닌지 고민됐다. 결국 못 가긴 했지만, 내 인생에 세 번째 파리를 기약하는 데에 이곳이 한몫했다.


오페라 역에서 8호선을 타고 5개 역을 이동해 군사학교라는 뜻의 에꼴 밀리테르(Ecole Militaire) 역에 내렸다. 역에서 3분 거리에 오늘의 맛집 르플로리몽(Le Florimond)이 있다. 오래된 동네 맛집 분위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으로 맛있는 점심 코스요리를 먹을 수 있는 곳이라 한다. 앙트레와 메인, 디저트 각각 무엇을 먹을지 마지막까지 행복한 고민을 하며 두근두근 가게를 향해 걸어가는데, 어라, 무언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가게가 캄캄하게 불이 꺼져있는 것이었다. 가까이 가니 정말 가게 문이 닫혀있었다. 분명 구글 지도에 영업 중이라고 뜨는데 말이다. 이럴 수가, 오늘도 시행착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20240601_122323.jpg 가지 못한 르플로리몽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빗방울까지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오늘은 또 우산을 놓고 왔다. 울적해지는 마음을 붙잡고 구글 지도로 서둘러 근처 음식점을 검색했다. 생각보다 음식점이 많지 않았다. 그마저 휴무인 곳이 꽤 되었다. 그리하여 대망의 여행 둘째 날 점심은- 가려던 맛집의 길 건너편에 있는 일본 음식점에서 연어 롤을 먹게 되었다. 오늘도 아는 맛이구나. 연어 롤은 충분히 맛있었지만 그래도 씁쓸한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 덤덤한 마음으로 연어 롤을 해치우고 앵발리드로 향했다.


20240601_124111.jpg 맥도날드에 이은 두번째 아는 맛, 연어 롤







앵발리드 Les Invalides



20240601_132416.jpg 앵발리드, 묵직한 군사 학교 건물 너머로 존재감 드러내는 황금 돔


앵발리드를 향해 걸어가다 보니 저 멀리 황금 첨탑이 올려진 금박 장식의 장엄한 돔 지붕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페라 가르니에나 루브르 박물관에 비하면 단조롭고 묵직한 디자인의 건물이었지만, 지붕의 화려함만은 단연코 최고였다. 밝은 석조 벽에 차분한 푸른색 지붕을 얹은 학교 느낌의 건물이 풍기는 첫 느낌은 절제미였는데, 이와 대조적으로 황금 카펫을 두른 듯한 금박의 돔형 지붕만은 거의 랜드마크급으로 화려해서 다소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존재감이 큰 금박 돔을 지표 삼아 앵발리드로 향했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앵발리드를 넓게 두른 펜스와 커다란 대문이 보였다. 대문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어서 얼른 실내로 들어가고 싶었다. 걸음을 재촉하는데, 이게 웬걸, 또 문제가 생겼다. 대문이 잠겨있는 것이다.



20240601_131139.jpg 이렇게 코앞에 있는데 못 들어가다니


앵발리드의 황금 돔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 대문이 잠겨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안에 관광객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니 분명 휴무일은 아닌데, 안내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대문 앞에 모여 있는 사람 중 몇몇에게 안에 어떻게 들어가는지 물었지만 다들 모른다고 답했다. 그중 두어 명은 상황을 알지만, 순전히 설명하기 싫어서 모른다고 하는 눈치여서 마음에 상처까지 받았다. 비는 계속 내리지, 맛집에다 앵발리드 대문에다 내찬 프랑스 사람까지 연이은 거절감에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막막함에 비라도 피하려 가까운 버스정류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여행인가, 착잡한 기분에 잠시 멍을 때렸다.


정류장으로 한 아저씨가 들어왔다. 어른다운 분위기가 느껴져서 용기 내 다시 물어봤다. 다행히 아저씨는 답을 알고 있었다. 점심 이후 특정 시간을 기점으로 앵발리드에 입장하는 출입구가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정반대 쪽에 있는 정문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진심으로 감사함을 전하고 구글 지도를 확인했는데, 앵발리드 부지가 워낙 커서 정문까지 가려면 이 비를 뚫고 10여 분을 더 걸어야 했다. 비에 젖어 앞머리는 뭉치고 머리칼도 볼품없이 가라앉았다. 마음도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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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도 가라앉았다. 오늘 입은 옷은 하필 빗방울 자국이 고스란히 보이는 기모 맨투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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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대부분의 사람이 우산을 안 쓰고 다녀서 우산을 놓고 온 게 덜 서러웠으니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까.


20240601_132014.jpg 우산을 거의 안 쓰는 사람들


정문 앞에 도착하니 한 달 뒤에 있을 파리 올림픽에 쓰일 경기장 설치가 한창이었다. 정문에 있는 검색대도 잘 통과했지만, 건물까지는 한참 걸어야 해서 또 울적했다.


20240601_132703.jpg 앵발리드 정문 앞에 설치 중인 파리 올림픽 경기장
20240601_133048.jpg 다시 봐도 축축한 날씨


하지만 침울한 시간이 길었던 만큼 군사학교와 군사 박물관으로 쓰이는 ㅁ자 형태의 건물 안으로 무사히 들어왔을 때, 큰 안도감이 느껴졌다. 띄엄띄엄 대포가 놓인 네모난 중정을 옆에 끼고 긴 회랑이 이어졌다. 여러 나라의 관광객들 속에 섞여 긴 회랑을 따라가며 나폴레옹의 무덤으로 곧장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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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무덤은 성당처럼 생긴 별도의 건물에 있었는데, 바깥에서 보았던 황금 돔이 바로 이 건물의 지붕이었다. 안에 들어서자마자 이게 무덤이 맞나 싶은 웅장한 홀이 눈앞에 펼쳐졌다. 호수처럼 고요히 가라앉아 있던 마음에 돌멩이 하나 풍덩 던져진 듯이 큰 감명이 울려 퍼졌다. 예상치 못했던 거대한 규모와 위엄이 넘치는 분위기에 넋을 잃었는데, 이곳 앵발리드의 나폴레옹 무덤에서 보낸 시간이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은 순간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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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이 28m에 달하는 높은 돔 천장을 받치고 있는 거대한 원형 기둥들과 곳곳에 수많은 아치로 나뉜 공간들, 여러 색의 대리석으로 다채롭게 문양을 낸 고급스러운 바닥, 시선 닿는 곳마다 서 있는 위엄있는 조각상들, 한눈에 파악할 수 없는 복잡한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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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기에 우선 가장 먼저 보이는 아치 안의 별실로 들어갔다. 별실은 천장화가 그려진 작은 돔 지붕이 있는 원형의 공간이었고, 가운데에 육중한 석제 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관을 바라보며 조각상과 창문이 교차로 둥근 벽을 둘러 서 있다. 관 위에는 여러 군인이 어깨에 시신을 짊어지고 있는 형태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어둡고 거친 조각에서 비장함이 느껴졌다. 이게 나폴레옹의 관인가 하고 유심히 바라보는데, 아무리 봐도 이름이 나폴레옹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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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중앙 홀로 나가서 찬찬히 살펴보니, 프랑스의 유명한 군사 지도자 세 명이 나폴레옹의 무덤에 함께 안장된 것이었다. 중앙 홀의 세 모서리의 별실마다 군사 지도자들의 관이 각각 하나씩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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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 정면에는 현란한 꽈배기 모양의 대리석 기둥으로 된 필로티 형태의 제단이 있고 그 안에 커다란 황금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조각상이 있다. 제단의 뒤쪽으로 벽을 따라 둥글게 계단이 나 있는데, 그 계단을 통해 나폴레옹의 관이 있는 지하로 내려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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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관은 앵발리드로 오는 내내 바라보았던 그 황금 돔 아래에 놓여 있었다. 실제로는 지하 1층이지만, 둥근 돔 모양 그대로 1층 홀의 바닥이 뚫려있어서 중앙 홀에서도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볼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중앙 홀에서 둥근 난간에 기대어 나폴레옹의 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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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과 지하의 모든 방을 천천히 둘러보고는 중앙 홀 한쪽에 놓인 대리석 벤치에 자리 잡고 앉았다. 거대한 초콜릿 같은 나폴레옹의 관, 화려한 천장화 둘레를 황금 테두리로 두른 돔 지붕, 봐도 봐도 신기한 마블링의 대리석 바닥, 북적이는 관광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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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돔 아래에 앉아 단단하고 매끈한 대리석의 서늘함을 피부로 느끼며 웅성웅성 사람들 소리가 울리는 것을 가만히 들었다. 모든 걸 눈으로만 담기에는 부족해 온 감각으로 호흡하듯이 공간 자체를 느끼며 이 순간을 몸에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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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무덤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낸 뒤 군사 박물관을 빠르게 둘러보고 앵발리드 근처에 있는 로댕 미술관으로 향했다. 여전히 비는 토도독토도독 내리고 있었지만, 앵발리드의 감명에 젖어 기분도 다시 상기되고 힘이 충전되었다. 비 오는 파리의 감성에 젖어 유유자적 걸어갔다.



20240601_150847.jpg 앵발리드에서 로댕 미술관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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