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의 루브르박물관 투어가 마무리되었다. 박물관의 규모를 생각하면 턱없이 짧은 관람이었지만, 3시간 넘게 바쁜 걸음으로 여기저기 누비고 나니 발바닥과 다리의 피로감이 이미 선을 넘은 느낌이었다. 어느새 3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아침 이후로 거의 먹은 것이 없이 돌아다녀서 배도 너무 고팠다. 배도 채우고 앉아서 한숨 돌릴 곳이 절실했다.
가깝고 적당한 음식점을 찾아보려 휴대폰을 켜는데, 두둥, 문제가 발생했다. 휴대폰 배터리가 나간 것이다. 관람 내내 사진을 수백 장 찍은데다 별 생각없이 포켓 와이파이까지 켜둔 바람에 더 배터리가 빨리 닳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빨리 방전된다고? 벙찐 나를 보며 가이드가 로밍 중에는 배터리 소모가 빠르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근처에서 배터리 충전할 곳을 찾기는 아마 어려울 거라고도 덧붙였다.
‘괜찮아요, 제겐 두둑하게 완충해둔 보조배터리가 있으니까요.’ 마음 속으로 대답하며 가방을 뒤지는데, 두둥, 이번엔 정말 큰 문제가 발생했다. 배터리가 없다. 여행 첫날부터 보조배터리를 희원이 집에 두고 오는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우르릉 쾅쾅, 청천벽력 같은 상황에 나는 고장난 얼굴이 되었다. 아니, 음식점 검색은 차치하더라도, 희원이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꼭 구글 지도를 계속 확인해야 하는데 말이다. 휴대폰 없이는 거의 국제미아나 마찬가지다. 난 거의 프랑스 벙어리인데, 아직 소매치기가 무서운데, 얼타는 표정으로 서툰 영어를 더듬거리며 길을 헤매긴 더 무서운데, 이 험난한 파리에서 벌써 미아가 되다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가이드에게 간곡히 사정을 설명하고 혹시 가지고 계신 보조배터리로 5%까지만 충전하면 안 되겠느냐 부탁했다. 가이드는 다음 투어를 인솔하러 떠나기 전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생명의 은인이 되어 배터리 수혈을 하사해 주었다.
사실 오늘 처음 만난 데다 다시 만날지도 알 수 없는 사람과 지친 몸으로 북적이는 박물관 출구의 비좁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방전된 휴대폰 배터리가 5%만큼 채워지길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나 감사하지만 어색하고 불편하고 진땀이 나는 일분일초였다. 세상 천천히 시간이 흐른 뒤, 겨우겨우 5%를 채워 공손히 작별 인사를 드리고 루브르를 빠져나왔다.
마음 같아선 천천히 거리를 구경하며 파리를 거닐고 싶었지만, 배터리가 30분을 버텨줄지 1시간을 버텨줄지 알 수 없었다. 안전하게 귀가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루브르에서 샤틀레 레알(Chatelet les Halles)역 가는 길, 그리고 생 모르 크레테유(Saint-Maur-Creteil)역에서 희원이네 집 가는 길만 확인하면 된다.
구글맵을 열어 벼락치기하듯이 빠르게 지도를 머릿속에 새기고 얼른 화면을 껐다. 모르는 길이 나오고, 어렵고 낯선 역 이름이 헷갈릴 때만 최소한으로만 휴대폰을 확인하면서 이동했다. 생명이 간당간당한 이 아이를 꼭 쥐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전철에 몸을 맡긴 동안 1분 1초가 얼마나 길게 느껴졌던가.
무사히 희원이네 동네에 도착해 길을 더듬어 가다 보니 얼추 알 것 같은 거리가 나타났다. 마음이 놓이면서 배가 매우 고파졌다. 분명 이 동네만의 맛집이 있을 테지만 너무 지쳐서 더 이상의 모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불과 몇 시간 전에 알게 된 ‘프랑스 식당의 브레이크 타임은 14시부터 19시까지’라는 놀라운 사실에 따르면, 오후 4시가 훌쩍 넘은 지금, 갈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이 사간엔 패스트푸드나 빵집, 중국인이 운영하는 식당 정도만 연다고 들었다.
그렇게 나의 프랑스 여행 첫 끼니를 해결할 곳으로 맥도날드를 가게 되었다. 전철역과 희원이네 집의 딱 중간 지점에 맥도날드가 있었다. 굳이 프랑스까지 와서 맥도날드를 먹는 상황이 처량했지만, 심신이 지쳐서 그런지 만만하고 익숙한 곳이 오히려 반갑기도 했다.
아담한 2층 건물인 맥도날드에 들어가니 1층은 주문하고 조리하는 공간이고 2층은 식사 공간이었다. 키오스크로 메뉴를 주문하려는데 절차가 한국보다 복잡했다. 메뉴도 고르고 결제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자꾸 뭔가 숫자를 기입하라는 화면이 떴다. 너무 피곤해서 뭘 더 알아볼 힘이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하며 아무 숫자 넣고는 주문을 마쳤다.
멍하니 카운터 옆에 서서 음식을 기다리는데, 맥도날드 직원이 왠지 카운터 앞에 서 있는 나를 신경쓰여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불안한 눈빛인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자기 일을 하려는 모습이었다. 나도 괜스레 불안해졌지만, 역시 아무렇지 않은 척 다소곳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이럴 때 휴대폰 배터리라도 넉넉했으면 눈 둘 데가 있어서 좋았을 텐데.
잠시 뒤 카운터 안쪽에서 매니저로 보이는 직원이 한없이 다소곳하게 서 있는 나를 향해 걸어 나왔다. 그 사람은 이날 프랑스에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친절한 태도로 ‘음식은 자리로 가져다줄 거야.’라며 나를 2층 테이블까지 바래다주었다. 아, 그래서 카운터 직원이 그런 눈빛이었구나. 헛웃음이 나왔다. 맥도날드가 뭐라고, 쉽지 않군, 허허.
2층에는 작디 작은 동네 맥도날드에서 프랑스 중고등학생들이 삼삼오오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풋풋하고 단정해 보이는 아이들이 수다 떨며 웃는 모습이 참 예뻤다. 곧 메뉴가 나왔다. 흐뭇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구경하며 배를 채웠다.
천천히 식사를 마치고 희원이네 맨션으로 향했다. 5분 정도 터벅터벅 걸어가니 드디어 맨션이 나타났다. 어제 처음 왔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곳보다 그리웠던 내 친구네 집! 국제미아 신세는 면했다. 얼른 들어가서 씻고 누워야지. 온 다리가 저리다.
맨션 안으로 들어가려면 맨션 둘레에 세워진 철창 울타리를 통과해야 한다. 울타리 중간중간에 문과 모니터가 있는데, 오전에 울타리 문을 어떻게 여는지 미리 배웠었다. 문 옆 모니터의 버튼을 누르면 각 세대의 성씨가 하나씩 차례로 나오는데, 화살표 버튼으로 화면을 넘겨서 희원이 남편의 성인 홍(HONG)을 찾아야 했다. 그 다음 호출 버튼을 누르면, 세대주에게 전화가 가서 원격으로 문을 열어줄 수 있다고 했다. 건물에 들어온 뒤엔 프랑스 특유의 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는 손바닥만큼 커다랗고 묵직한 노란색 열쇠로 현관문을 연 뒤에야 집 안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 있다.
구식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섞인 다소 불편한 방식이었지만, 10년 넘는 직장 경력에 워킹맘 생활로 다져진 짬바면 이 정도 해내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 가장 가까운 울타리 문으로 가서 자신있게 화살표 버튼을 누르며 ‘HONG’을 찾았다. 그런데 이럴 수가, 안 나온다. 당황하며 다음 문으로 넘어가서 다시 화살표를 하염없이 누르는데, 역시나 ‘HONG’이 안 나오는 것이었다.
울타리 문 앞에서 얼쩡거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지나가는 주민이 나를 미심쩍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도둑 아니에요, 선량한 외국인입니다ㅠㅠ..‘ 마음속으로 외치며 다음 문으로 넘어가 다시 화살표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여기서 드디어 ’HONG‘을 찾았다. 알고 보니 해당 입구의 세대만 표출되는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면 어차피 다 이어지는데 굳이 문을 나눠놓은 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무사히 통과했으니 됐다, 휴. 그렇게 긴 하루를 마치고 저녁 6시쯤 희원이네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얼른 휴대폰을 충전하며 카카오톡으로 남편에게 오늘 하루치 고생과 서러움 기타등등을 와다다 쏟아 보냈다. 정리하고 쉬는 사이, 태권도 학원 라운딩을 마친 희원이와 아이들이 귀가하고 형부도 퇴근했다. 먼저 집에 와 있는 나를 보고는 다들 왜 이렇게 빨리 왔냐며 놀랐다. 모두들 나의 첫 파리 여행 후기를 매우 고대하고 있었다. 여행 어땠냐며 달려와 묻는 가족들에게 ‘뿌엥’하며 외쳤다.
“첫날부터 맥도날드 먹었어어어어어~”
온 가족이 함께 저녁을 먹으며 늦은 밤까지 나의 여행 첫날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길을 찾으며 휴대폰 들고 다닌 모습을 재연하는 나를 보며 형부가 ‘위험할 뻔했다’며 ‘휴대폰 지키는 방법을 다시 교육해야 겠다’고 농담을 했다. 내일은 꼭 보조배터리 잘 챙겨야지. 왁자지껄하게 파리 여행 첫날밤이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