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 좋은 아침이 밝았다. 희원이네 가족들은 각자의 아침 일정을 위해 먼저 집을 떠났다. 가족들이 떠나고 조용해진 집에서 그 뒤를 이어 찬찬히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은 파리 시내에 있는 오페라 맹트농 호텔로 떠나는 날이다. 일정도 꽤 많은 날이다. 손바닥만큼 커다란 열쇠로 현관문을 잠그고 2박 3일 지낼 짐만을 챙긴 채 집을 나섰다.
프랑스에 온 뒤 처음으로 날이 좋았다. 파리에서 보낼 2박 3일을 축복하는 듯한 날씨였다. 처음 프랑스 도착했을 때의 긴장도 많이 풀렸고, 이번 여행의 대미를 장식하러 파리로 향하는 기분이 그저 좋았다. 이제 좡빌르뽕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눈에 익은 거리를 산보하며 출발했다.
우선 이히네 집을 빠져나와 전철역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벤츠 매장이 나온다. 다음엔 헬스클럽이 나오고 그 다음엔 학교가 나온다. 맞은편에 맥도날드가 보이면 슬슬 길을 건널 때가 된 거다. 길을 건넌 뒤 공사 때문에 좁아진 인도를 조심조심 지나 철로 밑 굴다리를 통과하면 왼편으로 전철역 입구가 보인다. 전철역 앞에는 버스정류장도 있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여기로 모여들었다. 조용하고 깔끔한 이 동네에선 이곳이 그나마 다소 번잡한 곳이다.
이정표가 되는 가게들을 점찍으며 천천히 거리 풍경을 감상했다. 이 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엿보는 마음으로 등교하는 학생들의 표정, 조깅하는 사람들의 건강한 기운을 흥미롭게 살폈다.
그러고 보니 프랑스에 와서 살찐 사람을 본 기억이 없다. 실제로 유럽에서 프랑스의 비만율이 가장 낮다고 한다.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거리를 다니다 보면 어디서나 조깅하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세상 아름다운 조깅 코스다. 이렇게 비현실적인 곳에서 매일의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낯선 감각이 좋았다.
첫 번째로 향한 곳은 오페라 역이다. 오페라 가르니에 근처에 있는 파리의 스타벅스 1호점이으로 유명한 스타벅스 카푸친스(Starbucks Capucines)가 있다. 그곳에 들러 모닝커피를 때린 뒤 호텔에 짐을 맡기러 갈 거다. 이젠 오페라 역도 낯설지 않다.
오페라 광장 쪽으로 나오는데, 우와, 날씨가 다 했다.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여기가 바로 벨에포크의 파리 한복판. 뒤를 돌아 오페라 가르니에를 바라보았다. ‘안녕..!’ 마음속으로 반가움을 전하며 오페라 가르니에 지붕 양 끝의 황금 동상을 올려다보았다.
오페라 가르니에의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커다란 전면광고가 함께 눈에 들어왔다. 현란한 원색에 자본주의 느낌 낭낭한 것이 뭔가 고색창연한 오페라 거리와는 동떨어진 감성의 광고였다. 그런데 그 감성이 어딘가 익숙했다. 자세히 보니, 세상에, 여기서 만나다니, 삼성이다. 삼성 갤럭시Z플립 광고다. 반가워라. 오페라 가르니에 전면광고에 삼성 갤럭시라니, 이거 뿌듯해도 되는 거겠지? 모든 게 흥미진진하고 기쁜 날이다.
출근하는 파리 시민들 속에 섞여 거리를 걸었다. 가로수 사이를 누비며 파리의 스타벅스 1호점으로 찾아갔다.
겉모습은 생각보다 작아 보였는데, 들어가 보니 안쪽으로 깊숙하게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여행 전에 미리 검색할 때 스타벅스 카푸친스 사진을 보고 기대가 컸었는데,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탁한 하늘색의 벽에 황금 장식, 천장에는 하늘그림과 샹들리에다. 정말 여기가 스타벅스인가요. 이곳에 내가 존재한다는 게 너무 행복했다. 이곳이 일상일 수 있는 파리 사람들, 부럽다, 부러워.
이제 주문할 차례다. 메뉴판을 올려다보니 여느 스타벅스처럼 세 가지 시즌 음료 사진이 상단에 있었다. 나라마다 시즌 음료가 다른 건지 한국에는 없는 메뉴였다. 파리에 왔으니 파리 메뉴를 먹어야지, 여행 중에 세 가지 꼭 다 먹어야지. 시즌 음료 중 하나를 주문했다.
직원에게 닉네임으로 나의 프랑스 자아 ‘져니(journee)’를 말했다. 친구가 해외여행 갈 때 여행지마다 자아를 만드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 만들었다. ‘journee’는 프랑스어로 ‘하루’라는 뜻이고, ‘여행, 여정’을 뜻하는 영어인 ‘journey’를 프랑스어식으로 변형한 여성 이름이라고도 했다. 게다가 내 이름을 빠르게 부른 발음과도 닮았으니 더 찰떡같이 마음에 들었던 져니.
내 발음이 어땠을지 몰라 슬쩍 직원을 봤는데 알아들은 눈치였다. 음료를 받아보니 ‘JOANIE’라고 적혀있었다. 아니, 이 또한 매우 마음에 드는 것. 이 순간부로 나의 프랑스 자아는 ‘JOANIE’가 되었다.
사실 파리의 스타벅스를 갈 때마다 상상도 못 했던 어려움을 겪었다. 아는 곳이 만만해서인지 스타벅스가 보이면 자연스레 들어가다 보니 여행 동안 총 4번 방문했는데, 가는 곳마다 시즌 음료 주문을 시도했으나 매번 주문에 애를 먹어야 했다.
우선 스타벅스 카푸친스에서는 메뉴판을 가리키며 짧은 영어로 주문을 시도했다.
“가운데 거 주세요.”
“나 그거 못 만들어. 다른 거 주문해.”
난생 처음 들어보는 말에, 그것도 스타벅스 직원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 상상도 못 했던 말에 매우 당황했다. 다른 메뉴 고민할 생각도 못 하고 버벅이며 말했다.
“어, 그럼, 왼쪽 거 주세요.”
다른 스타벅스도 상황은 비슷했다.
“가운데 거 주세요.”
“나 일한 지 얼마 안 돼서 그거 못 만들어. 다른 거 주문해.”
“왼쪽 거 주세요.”
“그거도 못 만들어.”
“자바칩 프라푸치노 주세요.”
“나 프라푸치노 종류 못 만들어.”
“아이스 카페라떼 주세요.”
“오케이.”
결국 시즌 메뉴는 카푸친스 이후로 다시는 맛보지 못했다. 정말 내심 깜짝 놀랐다. 손님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국 문화의 관점에서 순간 떠오른 말은 ‘감히’였다. ‘감히’ 못 만든다고 말할 수 있다니. 화가 났다는 건 아니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는 걸 상상도 못 했던 일이라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새 직원이 충분히 준비될 때까지 사장은 물론 손님도 기다려주는 문화란 생각에 이게 바로 프랑스인가 싶었다. 심지어 미안해하지도 않았단 말이다. 어려운 메뉴를 주문한 내가 오히려 실례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쏘 당당하게 못 만든다 했단 말이다. 무려 시즌 대표메뉴였는데, 말이 되나. 말이 되든 안 되든 그런 일이 벌어졌다. 무려 4번이나.
프랑스 여행을 하며 인상 깊었던 모습 중 하나가 바로 이같이 뭇 직원들의 태도였다. 넷플릭스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 속의 프랑스 사람들이 떠올랐다. 다정다감하기보다는 다소 냉랭하고 시크한 프렌치들. 말도 안 통하는 낯선 여행지에서 썩 친절하지 않은 사람들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위축되고 두려웠던 몇 주 전이 떠올랐다.
실제로 겪어본 그들은 냉랭하지는 않지만 1도 따뜻하지는 않았다. 쓸데없는 서비스 정신에 기운 빼지 않는 분위기랄까. 봉사와 서비스 정신을 강요당하면서도 회사로부터 보호받지 못해 힘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여행이 끝나면 프랑스가 웬 말이냐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
스타벅스 카푸친스 천장에 아기 천사들이 그려져 있었다. 귀여운 천사들 아래에서 들뜬 마음과 복잡한 심경이 뒤섞인 오묘한 기분으로 나의 유일한 파리 시즌 메뉴 ‘크림브륄레 아이스드 브라운슈가 오트 쉐이큰 에스프레소(Creme Brulee Iced Brown Sugar Oat Shaken Espresso)’를 마셨다.
이제 숙소를 찾아갈 차례다. 오페라 가르니에 광장 앞 대로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또 다른 스타벅스를 만나게 된다. 그 스타벅스 옆 골목으로 쭉 들어가면 나의 파리 숙소 호텔 오페라 맹트농(Hotel Opera Maintenon)이 나온다. 루브르박물관까지 9분 거리이고, 주변에 일식당과 한식당이 많다. 나의 여행에 딱 알맞은 최고의 위치다.
아직 오전이라 프런트에 캐리어를 맡기고 나가려 했는데, 운 좋게도 준비된 방이 있어 바로 체크인할 수 있었다. 로비에서 반 층만 올라가면 나오는 작고 아늑한 방이었다. 요 반 층까지는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프런트 아저씨가 캐리어를 들어주셨다. 퀸사이즈 침대에 폭 좁은 테이블과 행거가 있는 중정 뷰의 방이다. 역사 깊은 건물인 만큼 적당히 낡고 불편했지만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이 좋았다. 프랑스 파리에 이 방 하나만큼은 내 공간이다.
직원이 친절하다는 후기가 이 호텔을 선택하는 데에 한몫했는데, 정말 프런트 아저씨가 오며가며 먼저 인사를 건네고 매번 기꺼이 도와주었다. 좀처럼 웃지 않는 프랑스 사람들에 은근히 지쳐있던 와중에 그 친절함이 참 고마웠다. 당연한 거에 고마우면 안 되는데, 내 상식에 맞는 친절에 절로 안도하게 되고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힘을 얻어 오늘의 일정을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