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day 4, paris_오랑주리 미술관

by sseozi

호텔에서 큰길로 나와 거리를 구경하다 보면 루브르박물관이 나온다. 오늘의 목적지는 센강 쪽을 향해 좀 더 걸어가야 한다.




박물관을 지나 강을 향해 길을 꺾었다. 탄성이 절로 나오는 광경이 펼쳐졌다.



너무나 청명한 날씨에 왼쪽은 장식미술관과 꺄후셀 가든, 오른쪽은 튈르리 정원, 정면에는 눈부시도록 쾌청한 날씨를 즐기는 수많은 관광객과 조깅러가 가득한 넓은 길. 내가 발 디디고 서 있는 이 곳이 유럽이라는 게 실감나는 광경이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나도 한 폭의 풍경화 속 일부가 될 것 같았다.



왼쪽의 장식 미술관이 너무 멋져서 마구마구 끌렸지만, 오늘의 일정을 위해 오른쪽의 튈르리 정원으로 향했다. 긴 직사각형 형태인 이 정원의 반대쪽 끝에 오랑주리 미술관이 있다. 오늘의 일정은 거기서 시작된다.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그 유명한 모네의 ‘수련’을 관람한 뒤, 헤밍웨이가 단골이었던 셰익스피어앤컴퍼니 서점을 들렀다가, 오후에는 마이리얼트립으로 미리 신청해 둔 파리 미식 투어에 참여한다. 세 가지 일정 모두 너무나 기대해 온 것들이다.



튈르리 정원에서 많은 사람들이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풍경이었다. 하얀 모래 위 동그란 분수대 둘레에 놓인 의자마다 사람들이 앉아서 햇볕을 즐기는 모습. 그늘 하나 없는 벌판인 데다 땡볕이었는데 사람들이 선글라스만 끼고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었다. 그래, 선글라스를 놓고 왔다. 꼭 뭘 놓고 와요.



햇빛이 눈 부셔 나무 그늘 사이로 걸었다. 메가톤 아이스크림처럼 네모나게 다듬어진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자연스럽게 무성히 자란 나무들도 한데 섞여 있었다. 로댕 미술관도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나무를 다듬고 배치하는 게 프랑스의 방식인가 보다. 내 감각으론 너무 각 잡고 다듬어진 느낌이라 약간 군인 머리 같기도 하고 줄지어 선 모습은 벽 같기도 하지만 말이다.


튈르리 정원에서 홀로 독서에 전념하고 있는 파리지앵


워낙 공원이 넓어서 수많은 인파에 영향받지 않고 혼자만의 여유로운 기분을 만끽하며 거닐 수 있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찬찬히 정원을 가로지르다 보니 어느새 오랑주리 미술관에 도착했다.

오랑주리 미술관 Musée de l'Orangerie


미술관 앞은 입장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옆에서 올림픽 경기장과 관중석을 설치하느라 여기저기 길을 막고 차단벽도 세워놔서 더욱 혼잡했다. 긴 줄을 기다려 짐을 검사하고 한국어 오디오를 대여한 뒤에 입장했다.


들어가자마자 긴 타원 모양의 하얀 방이 나타났다. 처음엔 인파에 가려 작품이 잘 안 보였다. 인구밀도에 당황했다가 정신 차리고 살펴보니, 사람들 사이로 모네의 ‘수련’ 연작이 긴 벽을 따라 걸려 있는 게 보였다. 루브르 박물관 모나리자 언니 앞에도 사람이 정말 많았었지만, 거긴 전시실도 넓고 그 그림 하나만 주목받는 상황이라 좀 나았다. 여긴 모든 작품 앞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거기다 몇몇 중국 사람들이 셀카 삼매경에 빠져 그림을 가리고 있었다. 분위기 잡고 작품 앞을 거니는 모습을 몇 번이고 서로서로 영상으로 찍어주기까지 했다. 그 사람들이 지나가길 기다리느라 작품을 가까이서 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규모, 색감, 질감, 붓질 모두를 실컷 감상하며, 다른 시간대를 그린 것이라는 각 작품마다의 특징까지 온몸으로 새기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너무 혼잡했다. 사람이 나오지 않게 사진을 찍으려면 또 타이밍을 보아가며 작품 일부만 띄엄띄엄 담는 수 밖에 없었다. 감상에 집중하고 싶은데, 온 세상 사람들이 모여서 난리라 조각조각 단상을 모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네의 수련 연작을 실물로 영접하는 일은 감탄의 연속이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그 어떤 사진도 실물을 제대로 담지 못한 것이었다. 정말 말도 안 돼. 밤처럼 어두운 푸른빛과 보라, 부드러운 분홍, 여러 색이 바람에 흔들리는 안개처럼 뭉게뭉게 움직이는 듯했다. 버스만 한 거대한 캔버스가 붓질이 고스란히 보이는 터치로 가득했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햇빛 때문에 카메라에 본래의 색감을 담아낼 수 없었다. 실제로는 훨씬 짙고 다소 어두운 색이다.



몇 번의 붓질로 툭툭 던지듯 연꽃과 연잎이 피어났다. 그려져 있기도 했다.



산발한 머리카락처럼 검은빛을 드리운 버드나무는 스산함과 습기가 피부로 전해지는 듯했다.



가까이에서 보면 새우깡만 한 선을 휙휙 그어대며 대충 그린 것 같은데, 한 발짝 물러나 전체를 보면 거리와 깊이가 느껴졌다. 신비로운 색감에 어두움이 더해져 새벽 또는 저녁의 시간감이 느껴졌다. 하나같이 고요했다.




이 글을 쓰며 기억을 되살리려 구글 지도를 뒤적이다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오랑주리 미술관 내부를 찍은 로드뷰가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 하나 없이 텅 빈 전시실에 ‘수련’ 연작 총 8 작품이 360도 회전하는 로드뷰에 온전히 담겨있다. 실물이 온전히 담기지는 못했지만, 이걸 보니 그날 그곳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언제든 다시 이날을 떠올릴 수 있다니 기쁜 일이다.



원 없이 수련을 바라보다 지하 전시실로 향했다. 오랑주리에는 모네의 수련만 있는 줄 알았는데, 다른 작품들도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모네의 루앙 대성당 연작이다. 모네는 루앙대성장 연작을 모두 30점 그렸는데, 그중에는 찰나를 담기 위해 16분 만에 완성한 것도 있다고 한다. 연작품들은 세계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그중 세 작품이 오랑주리에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그저 물감을 뭉개놓은 것 같은데 멀리서 보면 어느 순간 눈이 자연스럽게 형상을 알아차린다. 도대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건지 감탄을 넘어 탄식이 흘러나왔다.





새로운 미술가를 알아가며 인상 깊은 작품들을 만났다. 특히 앙드레 드랭과 마리 로랑생의 작품들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젊은 견습생', 모딜리아니
'안토니아', 모딜리아니


'탬버린을 든 여인', 피카소


'인형을 든 아이', 앙리 루소
'쥐니에 신부의 마차', 앙리 루소
'결혼식', 앙리 루소


'어릿광대와 삐에로', 앙드레 드랭
'화가의 조카딸', 앙드레 드랭
'아름다운 모델', 앙드레드랭
'붉은 바지를 입은 오달리스크', 마티스


'암사슴들', 마리 로랑생
'코코 샤넬의 초상', 마리 로랑

오랑주리 미술관에도 미술 수업 중인 학생들을 마주쳤다. 고등학생 정도 되려나. 각자 종이를 한 장씩 들고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우연히 한 남학생이 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대충 꾸역꾸역 그려놓은 것이 골때리고 귀여워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관람을 마치며 기념품 샵에 들러 엽서와 책갈피, 그리고 컬렉션 해설집을 구매했다. 이 해설집은 언어별로 7가지 다른 색의 하드커버로 되어있는데, 알록달록한 책이 한데 모여 있으니 시선이 절로 가고 구미가 확 당긴다. 그리고 7가지 중 커버가 연 베이지색 바탕에 체리 색 글씨로 된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한국어판이다! 너무나 반가운 것!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랑주리에 많이 오나!? 안 살 수가 없었다. 굿즈 쇼핑을 신나게 마친 뒤, 고대하고 고대해 온 셰익스피어앤컴퍼니 서점으로 향했다.

keyword
월, 목 연재
이전 15화day 4, paris_스타벅스 카푸친스에서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