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레온에서 산티아고를 시작하기도 하고 끝내기도 한다. 시작하는 사람들의 눈빛에는 기대감이, 떠나는 이들의 눈가에는 아쉬움이 맺혀있다. 짧은 휴가를 끝내고 프랑스로 돌아가야 하는 마리와 기도 마찬가지였다. 짙은 어둠이 드리운 새벽. 오늘도 가장 먼저 길을 나서는 나를 마리와 기가 따뜻하게 배웅해 주었다.
"아란, 여기" 마리와 기는 내 손에 등산양말과 헤드랜턴을 꼭 쥐어주었다.
"너 양말 한 켤레밖에 없잖아. 덜 마른 양말 신지 말고 이거 신어."
산티아고 시작 전 양말을 세 켤레를 챙겼다. 그런데 두 켤레는 알베르게에서 잃어버렸고 나에게 남은 건 초록색 양말 한 켤레뿐이었다. 새벽이슬을 맞거나, 날이 흐리면 옷이나 양말이 제대로 마르지 않았다. 물론, 양말을 신고 2~3시간 정도 걸으면 다 마르기는 하지만 그 찝찝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다 마르지도 않은 축축한 양말을 신고 엉거주춤 걷는 내 모습에 다른 순례자들이 웃는 걸 본 마리와 기는 내 처지가 못내 신경 쓰였는지 이별 선물로 양말을 건네주었다.
"메시보꾸.(정말 고마워요.)"
"나중에 파리에 오게 된다면 꼭! 연락해야 해."
"당연하죠. 부엔 까미노"
"부엔까미노. 이구알멘떼."
선물 받은 양말을 두 손으로 어루만져본다. 발목을 잡아주는 단단한 발목 부분은 뒤처질 때마다 앞에서 나를 기다려주고 뒤돌아봐주는 기 아저씨를 떠올리게 하고, 부드러운 발등 부분은 따스한 말로 위로해 주시는 마리 아주머니를 생각나게 했다. 두 분을 닮은 이 포근한 양말 덕분에 산티아고를 무사히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 포옹을 나누고 나는 레온 알베르게를 나섰다. 이별은 익숙해질 만도 한데 눈물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끊임없이 솟구쳐 올랐고내 눈가가 마르지 않은 초록색 양말처럼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언제쯤 단단해질까?
마리와 기 아저씨 커플과 헤어지기 전, 로쵸패밀리와 저녁에 만날 알베르게를 정하고 혼자 걷는다. 처음 시작은 혼자였지만 그 끝은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된다. 어두운 밤 길가에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면서 길을 비추듯, 나도 하나, 둘 친구를 사귀면서 나의 삶의 조금 더 빛나고 풍요로워지는 듯하다. 강렬한 태양빛을 걷고 또 걷는데 누군가가 '세뇨리따'라고 외친다. 나는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걷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고 작은 개울가에 발을 담그고 있는 그녀에게 되물으면서 그녀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요??(저요??)"
"응, 올라! 세뇨리따! 뭐가 그렇게 급해? 천천히 즐기면서 가도 돼. 오늘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 발도 휴식시간을 주어야지."
그녀의 말도 일리가 있다. 3일 동안 100km를 걸었다. 진통제 덕분에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던 발등은 다시 고기압의 영향을 받았는지 날이 지날수록 볼록하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신발과 양말을 벗어놓고 그녀를 따라 양말과 신발을 벗고 개울가에 발을 담갔다.
"어디에서 왔어?"
"한국에서 왔어요. 저는 아일랜드에서 영어공부 중이에요."
"정말? 나는 영국에서 왔어. 만나서 반가워."
사십 대 중반정도 돼 보이는 그녀의 이름은 다리나였고 런던 근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 했다. 방학을 이용해서 산티아고 순례 중이며 10년 넘게 한 교사생활이 본인에게 맞지 않아 새로운 직업을 찾고 싶은데 막상 또 시작하려니 겁이 나서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고 했다. 남편은 그녀가 용기를 되찾고, 새로운 꿈을 발견할 수 있도록 산티아고도보순례를 추천했다고 했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그녀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다리나, 원하는 답은 찾으셨어요?"
"아니.. 아직.. 삼분의 일정도 남았으니까 천천히 찾아봐야지 뭐. 못 찾으면 또 뭐 어때. 이 길을 경험한 게 인생의 큰 사건이지."
"저도 그래서 산티아고에 왔어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은 너무 바빠요. 뒤처지지 않으려면 부단히 노력해야 해요. 가끔 노력하다 보면 내가 뭘 위해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허무해지더라고요.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아일랜드에 왔고, 다시 여기에 왔어요. 제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할 일을 찾고 싶은데..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을까?' 그녀에게 묻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뒤처지고 싶지 않아 발버둥 치지만 한 발짝 멀리서 보면 알맹이 없는 개살구 같은 삶은 아닐까? 인생은 주관식인데 늘 객관식 정답대로 살아야 백점맞고 인정받는 시험 같았다.
'나도 이 길이 끝나면 조급했던 마음은 내려놓고 마음의 여유와 자아를 찾을 수 있을까?' 혼자만의 생각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다리나에게 짧은 작별인사를 건네고 떠날 채비를 했다.
"너는 원하는 걸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거야. 만약 찾지 못하더라도 괜찮아. 생각의 폭을 넓히고 행동하면 길은 반드시 열려있어. 부엔까미노."
"감사해요. 다리나도 반드시 새로운 직업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부엔까미노."
다리나와 헤어지고 혼자마의 상념에 빠져 걷는데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직진과 좌회전, 어떤 길을 선택해도 산티아고는 나오기는 한다. 나는 좌회전 코스를 선택해서 걷는다. 정수리를 때리던 햇빛이 살짝 기울었고 로쵸패밀리와 약속한 22km는 지난 것 같다. 중간에 바에 들어가 사장님께 여쭤보니 로쵸패밀리와 만나기로 한 알베르게는 직진을 해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발등도 점점 아파오고 되돌아갈 수도 없어 커피 한잔 마시고 10km를 더 걷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