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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Sep 26. 2024

아스토르가

선물 같은 하루 

 창문을 통해 들어온 따스한 아침 햇살이 나의 단잠을 부드럽게 깨웠다.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 늘어지게 기지개를 한번 켜고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뜨며 옆을 돌아봤지만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스무개의 침대가 나란히 놓인 방에서 나 혼자만이 침대에 덩그러니 앉아있을 뿐이었다. 


 '딸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문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오스피탈레로 아주머니께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오셨다.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멋쩍은 웃음을 가까스로 지어 보였다. 그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손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쵸. 오쵸.(여덟 시)" 


 그 말을 듣고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8시 30분. 정해진 퇴실 시간은 없었지만 이 상황이 기가 막혀 헛웃음만 나왔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고양이 세수만 하고 서둘러 짐을 챙겨 나왔다. 새벽길을 걸을 때는 반드시 노란 화살표나 조가비가 있어야 길을 찾고 걸을 수 있지만 해가 중천에 뜬 지금은 달랐다.저마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가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노란 화살표이자 조가비가 되어주었다. 사람들의 뒤를 따라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며칠 동안 무리해서 걸어서인다리와 어깨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져 천천히 걷는다. 목적지인 아스토르가에 닿기 전, 돌십자가 앞에 멈춰 앉아 물 한 모금으로 갈증을 달래며 거친 숨을 고르고 있는데 멀리서 스페인 커플이 반가운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혹시 안토니오 친구 아니세요?" 


 안토니오는 스페인 쿠엥카 출신 순례자로 카미노 둘째 날 라라소냐 개울가에서 카미노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다 보니 사람들 얼굴과 이름이 어렴풋이 기억나는 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아~~ 알아요! 안토니오. 쿠엥카 출신 맞죠? 오며 가며 얼굴을 자주 보곤 했는데 며칠 전부터 어찌된 일인지 보이지 않네요." 


"아.. 그렇구나.. 우리 전에 안토니오랑 같이 걸었었잖아요."  


"아! 맞다, 맞다. 기억이 나요. 아픈 데는 없죠? 발은?? 무릎은요? 밥은 먹었고요? 안토니오는 어디 있나요?"


"당신은 여전하네요. 우리는 괜찮아요. 당신은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


"저는 발이 조금 아주 조금 아파 천천히 걷는 중이랍니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지만 짧은 대화와 함께 프링글스를 나누어 먹었고 길을 먼저 나서는 그들을 향해 나는 인사를 건넸다.  


"나중에 안토니오 만나면 내 안부 전해주세요."  



 

 아스토르가에 도착했다. 아스토르가는 스페인 최초의 인류 화석 기록이 나아있는 역사적인 도시다. 전설에 따르면 성 야고보와 성 바오로가 이곳에서 설교했다고 하니 종교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소다. 

 

 알베르게에 도착해 씻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커다란 배낭을 멘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로쵸, 장까를로, 글로리아였다. 글로리아는 나를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와락 안아주었다. 


"아란 미안해. 우리도 두 갈래 길이 있을 줄 몰랐어." 


 레온에서 아스토르가까지 가는 길은 두가지가 있는데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다. 결국 아스토르가에서 만나게 되었지만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하는 글로리아를 한 번 꼭 안아주며 나는 말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게 인생이죠." 


 이따 숙소에서 보자는 짧은 인사와 함께 나는 엽서를 사러 시내로 나섰다. 작은 마을만 다니다가 도시의 복잡한 풍경을 마주하니 길을 잃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두리번거리며 걷던 중 한 아저씨에게 길을 물었다. 


"타바꼬가 어디인가요?" 무지개떡 티셔츠에 핫팬츠, 밀짚모자에 꽃을 꽂고 선글라스를 낀 범상치 않은 패션. 속으로 아차! 싶었지만 아저씨는 자전거를 세워두고 친절하게 타바꼬까지 안내해 주셨다. 그런데 문제는 아저씨가 가지 않고 아스토르가 가이드가 되어 관광시켜 주셨다. 


"여기는 아스토르가에서 유명한 하몽집이에요. 현지인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지요." 


 아저씨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친절한 하몽집 사장님께서 맛보기 하몽을 주셨다. 그리고는 보여줄 게 있다며 스페인 대형마트로 안내해 주셨다. 마트의 바닥은 유리로 되어 있었고 고대 로마인들의 유적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고대 로마인들의 흔적이에요. 아스토르가는 스페인 내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유적지 중 하나로 오랜 역사의 이야기를 간직한 곳이예요." 


 아저씨의 개성 넘치는 스타일 내면에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상당한 자부심을 묻어났다. 아스토르가가 스페인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못지않게 역사유적과 볼거리가 많은 도시의 매력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 같았다. 감사 인사를 표하고 나는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갔다.  


 짧은 아스토르가 투어를 마치고 알베르게에 돌아왔는데 누군가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Araaaaaaaaaaaaan" 고개를 돌아보니 팜플로나에서 함께 택시를 타고 이동했던 쟈넷, 마리벨, 안토니오가 있었다. 서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가고 싶었지만 모두 발이 좋지 않아 절뚝거리며 서로에게로 다가가 포옹을 했다. 치카말로(나쁜 놈)에서 날 구해준 쟈넷과 마리벨은 애칭으로 치카말라(나쁜 계집애)라고 부른다. 쟈넷은 절뚝거리면서 꿀 정보를 하나 알려주었다. 


"치카말라. 아란, 여기서 순례자를 위한 치료를 해준대. 종이에 이름 적고 조금 기다리면 치료해 줄 거야."  


"고마워. 근데 쟈넷. 발목 많이 아픈 거야?"

"조금 절뚝거리긴 하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너도 어서 치료받아." 

"응. 고마워." 


 그들은 내 차례가 될 때까지 함께 기다려주었다. 발목, 무릎, 발등 치료를 받은 후, 우리는 함께 알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공용 컴퓨터에서 메일을 확인하는데 오스피딸레로 아저씨가 나를 부르셨다. 


 "치카! 우나 포또.(소녀, 사진 한 장)"


 사진을 찍어주는 캠이 있었다. 의자에 앉아보라고 하더니 사진을 찍어주셨다. 사진을 찍고 웃으며 확인하는 순간 프랑스 출신 사리야끄와 실바가 알베르게로 들어왔다. 아스토르가에서 동창회라도 하는 건가? 아니면 오늘이 내 생일인 건가? 착각할 정도로 많은 순례자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사리야끄, 실바! 이게 얼마만이야~~ 잘 지냈어?"


"그럼, 너 한동안 안 보여서 얼마나 걱정했다고." 


 사리야끄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니 글쎄, 샤리아끄가 너 찾겠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보고 다닌 거 있지? '혹시 꼬레아 치카 못 보셨나요?' 하면서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녔어." 


 그 말을 들으니 목이 메었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고작 시끄러운 한국 여자애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했어.... 고마워 정말.. " 울먹거리는 두 여자 사이에서 실바가 말을 꺼냈다. 


"레온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나 봐. 아무리 널 찾아봐도 동양인은 보이지 않지, 여기저기 물어봐도 동양인을 못봤다는 거야. 그래서 포기했는데 여기서 널 만날 줄이야. 사람 인연이 참 어떻게 될지 몰라. 그치? 그래도 널 이렇게 다시 보니 정말 좋다."


"나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나랑 같이 걸었던 순례자들이 안 보이는 거야.. 처음엔 살짝 외롭고 당황스러웠만 다른 분들만 함께 걷게 되었고 스페인어도 조금 늘었어. 이제 숫자도 잘 센다고. 우노. 도스. 뜨레스... 꽈뜨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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