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를 돌아보니 맥가이버 머리의 아나와 마리아가 나를 향해 방긋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곧장 그들에게로 다가갔고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아나, 무릎도 안 좋은데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거 봐, 마리아. 내가 여기에 있을 거라고 했지?" 아나는 너스레를 떨며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돌리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 어제 엄마가 갑자기 입원하셨다는 연락을 받았어. 그래서 오늘 다시 오비에도로 돌아가야 해. 너도 알겠지만 레온이 큰 도시잖아. 오비에도 가려면 레온이 가까워서 버스 타고 왔지. 떠나기 전에 겸사겸사 너한테 인사하고 말이야. 왠지 너는 사립보다는 공립알베르게에 있을 것 같더라고. 하하."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아나의 얼굴에는 씁쓸함과 아쉬움이 가득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입원 소식도, 카미노를 끝내지 못하고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아쉬움도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없었지만 작게나마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다.
기억에 남는 선물보다 공허해진 마음을 아주 조금이나마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의미있는 선물을 하고 싶었다. 그때 론세스바예스에서 산 조가비가 문득 떠올랐다. 나를 위해 샀던 조가비 하나,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한 조가비 또 하나. 오늘 그 조가비 마침내 주인을 찾은 듯 했다. 조가비가 가진 의미를 다시 한번 새기며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아나, 마리아. 나 잠깐 가방만 두고 올게. 미안하지만 5분만 기다려줄래?"
"괜찮아. 기다릴게."
배낭을 메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방 깊숙한 곳에서 깨질까 봐 조심스럽게 꽁꽁 싸두었던 가리비 껍데기와 맥심 2 봉지를 꺼냈다. 가리비 껍데기 뒷면에는 "쾌유를 빌어요."라는 작은 소망을 적었고, 맥심 봉지에는 '아나', '마리아' 이름을 한국어로 정성스럽게 적었다. 나의 작은 정성이 누군가에게 일말의 힘이라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갑작스러운 이별 앞에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한없이 초라한 조가비와 인스턴트커피뿐이었다. 그 작은 선물을 손에 들고 다시 마당으로 나가 아나와 마리아에게 건넸다.
"조가비는 엄마 꺼, 커피는 언니들꺼" 두 사람은 받긴 받았지만 조가비와 맥심봉지에는 이상한 문자가 써져있고, 맥심커피는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라 그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산 조가비야. 이건 한국어인데 '쾌유를 빌어요'라는 뜻이야."
조가비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맥심 커피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했다.
"그리고 이는 한국식 커피. 종이컵에 넣고 뜨거운 물 붓고 저어서 마시면 돼. 언니들한테 받은 건 많은데 이것밖에 줄게 없네. 미안해."
아나는 조가비의 굴곡진 껍데기를 손으로 어루어만졌고 그녀의 크고 동그란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기 시작했다.
"고마워. 정말."
"진심으로 엄마가 괜찮아지시길 기도할게. 그동안 함께 해줘서 정말 고마워."
우리는 잠시 걱정은 내려두고 이별의 포옹을 나누며 서로의 길과 인생을 응원했다.
"너의 길을 응원해. 부엔 까미노."
"이구알멘떼(언니들도). 부엔까미노."
"고마워 정말. 마리아, 이제 갈 시간이야."
"아스따 루에고.(나중에 보자.)"
두 사람을 통해 나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같은 길을 함께 걷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국적, 나이, 언어는 부차적인 요소일 뿐 마음이 통하는 순간 모든 경계는 사라지는 듯 했다. 관계의 척도는 시간과 횟수가 아닌 마음의 크기인걸 알려 준 두 사람 덕분에 오늘도 조금 성장한 기분이 든다.
아나와 마리아는 배낭을 메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나는 대문밖에서 언니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그들이 뒷모습이 점점 멀어졌고 이별의 아쉬움은 눈물이 되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